"전공의는 돌아왔지만"...필수의료 붕괴 우려 확산
의사 인력정책이 국내 의료체계 패러다임의 균열을 드러내고 있다. 1년 7개월 넘게 이어진 의정갈등은 일단락됐지만, 필수의료 인력 붕괴와 수도권 쏠림, 지역 의료공백 심화라는 구조적 후폭풍이 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방안에 대해 감사원이 부적절한 예측에 기반한 결정이었다고 지적하면서, 향후 의사 인력 수급 조정 과정이 의료정책 신뢰 회복의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의정갈등은 지난해 2월 보건복지부가 2025학년도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고 향후 5년간 1만명 증원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촉발됐다. 의대 증원안에 반대하는 전공의들이 집단으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수련병원을 떠나면서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의료 공백 사태가 이어졌다. 이후 복지부가 전공의 복귀 대책을 단계적으로 내놓으면서 지난 9월까지 약 60퍼센트 수준의 전공의가 복귀했고, 갈등은 형식상 마무리 국면에 들어갔다.

복지부는 사직 전공의가 이전 근무 병원의 동일 과, 동일 연차로 돌아올 경우 수련정원 초과도 예외적으로 인정했다. 군 미필 전공의에 대해서는 수련 종료 시점까지 최대한 입영을 연기할 수 있도록 했고, 전문의 자격 취득 지연을 줄이기 위해 수련 종료 기준 시점보다 앞서 전문의 시험 응시를 허용하는 방안도 가동했다. 실제로 4년차 전공의가 수련을 마치기 6개월 전 시험을 치르고 남은 수련을 채우는 방식으로 전문의 배출 속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의료현장에서는 전공의 복귀에도 불구하고 필수의료 기반은 더 취약해졌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복지부가 공개한 2025학년도 하반기 전공의 모집 결과 전체 충원율은 59.1퍼센트에 그쳤고,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인력 편차가 한층 더 커졌다. 수도권 수련병원의 전공의 충원율은 약 63퍼센트로 비수도권 수련병원 53.5퍼센트보다 9.5퍼센트포인트 높았다.
병원별 편차도 극명하다.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성모병원 등 이른바 빅5 수련병원은 정원의 70~80퍼센트 수준까지 전공의가 복귀한 반면, 다수 지역 수련병원은 정원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전공의 복귀와 신규 지원이 피부과, 성형외과, 정형외과 등 수익성과 근무환경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인기과목에 집중되면서 필수의료 분야의 공백은 오히려 확대되는 구조다.
대표적인 필수진료과로 꼽히는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소아청소년과의 비수도권 선발률은 8퍼센트, 심장혈관흉부외과는 4.9퍼센트에 그쳤다. 필수진료과일수록 수도권과 비수도권 격차가 더 벌어지는 역전 현상도 두드러진다. 비수도권 산부인과 충원율은 27.6퍼센트로 수도권 58.3퍼센트에 비해 30.7퍼센트포인트 낮았다. 심장혈관흉부외과 역시 비수도권이 4.9퍼센트, 수도권이 32.8퍼센트로 27.9퍼센트포인트 차이가 났다.
의정갈등 장기화 과정에서 전공의 이탈로 발생한 공백을 메워온 진료지원 간호사 이른바 PA 간호사의 역할과 법적 업무범위를 어떻게 재조정할 것인지도 남은 쟁점이다. 전공의 부족을 PA로 땜질한 구조가 고착될 경우, 의료행위 책임소재와 환자 안전, 직역 간 갈등이 동시에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가 의료계와 간호계 양측에서 제기돼 왔다.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신뢰도도 흔들리고 있다. 감사원은 최근 윤석열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 전반을 감사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의대 2000명 증원 규모 결정이 부적절한 인력 수요 예측과 상향 요구의 반복 속에서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감사 결과에 따르면 정부 부처가 처음 제시한 증원안은 500명 수준이었으나, 대통령 보고 과정에서 증원 폭 확대가 반복 요구되면서 1000명, 다시 2000명으로 상향 조정됐다.
향후 의대 정원 조정을 담당하는 의사인력 수급추계위원회는 2027학년도부터 적용할 적정 의사 수를 추산하고 있지만, 올해 마지막 전체회의에서도 구체적인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의대 정원 재조정과 필수의료 인력 확충 방식을 둘러싸고 정부와 의료계, 시민단체 간 추가 갈등이 재점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의료계는 필수의료 의사 부족을 단순한 절대 인력 부족보다 구조와 배분의 문제로 본다. 수도권 대형병원과 인기과 쏠림을 완화하기 위해선 필수의료 분야 수가 현실화, 분만과 외상·중증수술 등 고위험 진료행위에 대한 형사처벌 면제 또는 제한적 책임 제도 도입 등 사법 리스크 완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요구가 크다. 실제로 필수의료 분야 전문의들은 의료사고 소송과 형사처벌 가능성을 주요 기피 요인으로 꼽아 왔다.
황규석 서울시의사회장은 필수의료 인력난의 근본 원인을 사법 리스크와 낮은 수가에서 찾는다며, 지역 간 격차 역시 의사 수 부족보다는 배분의 문제로 보는 시각을 제시했다. 도시 선호가 강한 사회·경제 구조 속에서, 위험도와 노동 강도는 높지만 보상은 낮은 필수과와 지방 근무를 선택하도록 유도할 유인체계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외과와 산부인과 등 필수의료 분야에 대한 형사처벌 면제 수준의 사법 리스크 완화와 수가 조정, 그리고 무너진 의료전달체계 재정비가 함께 이뤄질 경우 필수의료 붕괴와 지역의료 격차 문제를 상당 부분 완화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산업계와 정책당국이 의사 인력 규모 확대 논쟁을 넘어, 인력 구조와 보상, 책임 체계를 아우르는 중장기 설계를 마련할 수 있을지가 향후 의료시스템 안정의 관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산업계와 의료계는 새 인력 정책이 실제 현장에서 작동할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