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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향 따라 옥정호를 걷는다”…임실에서 찾은 미식과 쉼의 하루

배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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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말마다 임실을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예전엔 치즈 축제로만 떠올리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호수를 바라보며 걷고, 화덕에서 갓 구운 피자를 나눠 먹는 하루여행의 일상이 됐다. 사소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느리게 쉬어 가고 싶은 마음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섬진강 상류에 자리한 전북 임실군은 먼저 풍경으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물빛이 유난히 푸른 옥정호와 낮게 둘러선 산세가 만들어내는 장면은 도시의 소음을 잠시 잊게 만든다. 가을이면 옅은 안개가 호수 위를 스치고, 물가를 따라 난 길에는 한 겹씩 붉고 노란 잎이 내려앉는다. SNS에는 옥정호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과 함께 “생각보다 더 조용해서 좋았다”는 짧은 후기가 자주 붙는다.

옥정호 출처 :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
옥정호 출처 :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

미식의 첫 무대는 성수면 도인리에 자리한 화덕쿡이다. 임실 치즈의 고장답게 이곳의 주인공도 치즈다. 손님들은 오픈 키친 앞에서 반죽이 빚어지고 화덕에 들어가는 순간을 지켜보다가, 가장자리가 노릇하게 부풀어 오른 피자가 나오면 무심코 웃음을 터뜨린다. 고소한 치즈 향과 함께 신선한 채소, 토마토소스가 한데 어우러진 한 조각을 베어 물면, “굳이 멀리까지 온 보람이 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치즈를 아낌없이 올린 파스타와 리조또, 육즙이 살아 있는 플레이트 메뉴도 여행의 허기를 달래 준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지역 관광 통계에서는 호수 주변과 맛집을 함께 찾는 ‘당일 미식 여행’ 패턴이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로 나타난다. 굳이 유명 관광지가 아니어도, 잘 쉬고 잘 먹을 수 있는 조용한 지역을 찾는 흐름이 커지고 있다는 의미다. 한 여행 전문가는 요즘 임실 같은 지역으로 향하는 움직임을 두고 “풍경과 음식, 그리고 속도를 천천히 맞추려는 여행자의 선택”이라고 표현했다.

 

배를 채웠다면 이번에는 자연 속으로 들어갈 차례다. 관촌면 관촌리에 위치한 사선대는 이름처럼 전설이 깃든 곳이다. 맑은 계곡물이 바위를 감싸 흐르고, 세월에 깎인 기암괴석들이 굽이마다 다른 표정을 만든다.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풍경은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고요하다. 잘 정돈된 산책로를 따라 가을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면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관광버스 행렬이 몰리는 명소와 달리 붐비지 않아, 사진 한 장을 찍더라도 사람 대신 풍경만 담을 수 있다는 점이 여행자들의 마음을 잡는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할머니 댁 가는 길에만 지나치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일부러 들른다”, “계곡 소리 들으면서 걷다가 그냥 벤치에 앉아 있기만 해도 시간이 빨리 간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누군가는 “아이와 함께 돌멩이를 던지며 물결을 바라보다가, 오히려 내가 더 위로받는 기분이었다”고 적었다. 자연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사치가 아니라 쉼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이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또 다른 정지된 시간이 기다린다. 옥정호를 품은 운암면 운종리의 하루는 차 한 잔을 매개로 한 공간이다. 백 년의 시간을 품은 한옥 송하정과 모던한 건물 밀다헌, 그리고 자연 속 힐링 공간인 티움관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바람은 한옥의 낡은 기둥과 유리창을 스치며, 오래전 이곳을 오갔던 사람들의 발자국을 떠올리게 만든다.

 

차를 주문해 한옥 툇마루에 앉으면, 옥정호의 수면이 한 폭의 그림처럼 창가를 채운다. 여행자는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이게 진짜 휴가 같다”고 조용히 표현한다. 창밖으로는 요가나 명상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티움관에서는 차를 직접 우려 보고 향을 느껴보는 체험이 이어진다. 한 심리전문가는 이런 시간을 두고 “몸의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추는 연습”이라고 전한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리듬이 안정될수록, 일상의 피로가 바닥으로 가라앉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기자가 비슷한 공간을 체험해 보니,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호수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이 있었다. 어디를 가야 할지, 무엇을 더 봐야 할지 고민하던 마음이 서서히 옅어지고, 지금 앉아 있는 자리 자체가 여행의 목적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요즘 여행자들에게 중요한 건 화려한 명소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공간’에 가 있는 감각에 가깝다.

 

도시에서 온 여행자들은 임실에서의 하루를 이렇게 기억한다. 아침에는 치즈가 듬뿍 올라간 피자를 나누어 먹고, 오후에는 계곡을 따라 걷거나 옥정호를 내려다보며 차를 마시는 시간. 누군가는 “가족과 함께 와서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다시 테이블에 둘러앉아 오늘 본 풍경을 이야기했다”고 회상했다. 함께 있지만 서로를 조급하게 재촉하지 않는 여행 방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 장면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을 ‘느린 감각을 회복하려는 여행’이라고 부른다. 치즈 한 입의 고소함,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 차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김까지 세세하게 느끼려는 태도가 여행의 중심에 놓인다는 뜻이다. 예전처럼 몇 군데 명소를 빠르게 찍고 돌아오는 일정과는 분명히 결이 다르다.

 

임실의 풍경과 맛, 그리고 고요한 시간은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화려한 볼거리가 많아서가 아니라, 걷고 먹고 쉬는 기본적인 행위가 조금 더 다정한 기억으로 쌓이기 때문이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이번 가을, 치즈 향 따라 옥정호를 걷는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오래 미뤄둔 쉼을 다시 꺼내는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배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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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화덕쿡#사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