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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4.5일제 찬성 78퍼센트”…블라인드 설문이 던진 노동 경쟁력 질문

오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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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온라인 설문에서 주 4점5일제 도입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에 참여한 10명 중 8명은 근로시간을 줄여도 생산성과 국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 쪽에 서 있는 셈이다. 특히 이번 조사는 직장인 소셜 플랫폼이 노동 시간과 생산성에 대한 첨예한 논쟁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IT 기반 플랫폼의 사회적 영향력에 새로운 함의를 던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디지털 기반 설문 데이터가 향후 근로제도 개편 논의에 참고 지표로 활용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직장인 소셜 플랫폼 블라인드는 11월 27일부터 12월 7일까지 자사 모바일 앱에 접속한 한국 직장인 1만 6920명을 대상으로 주 4점5일제에 대한 인식 조사를 진행했다. 전체 응답자 가운데 78퍼센트가 제도 도입에 찬성한다고 답했으며, 반대 의견은 14퍼센트에 그쳤다. 나머지는 유보 혹은 무응답층으로 해석된다. 찬성 응답 비율은 반대 응답보다 5배 이상 높아, 근로시간 단축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이 상당히 진전된 양상을 보여 준다.  

근속 연수가 길수록, 그리고 재직 중인 회사 규모가 작을수록 주 4점5일제 찬성률이 높다는 점도 눈에 띈다. 경력 14년 이상 직장인 그룹은 81퍼센트가 찬성했고, 9년 이상 14년 미만 80퍼센트, 5년 이상 9년 미만 78퍼센트, 1년 이상 5년 미만 76퍼센트, 1년 미만 72퍼센트 순으로 나타났다. 장기간 조직 문화를 경험한 계층일수록 노동시간 단축의 필요성을 더 강하게 체감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재직 기업 규모로 보면 300명 미만 기업 근로자의 찬성률이 86퍼센트로, 1만 명 이상 대기업 재직자의 77퍼센트보다 높았다. 인력 여유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중소 규모 조직일수록 근로시간 단축이 인재 유지와 조직 효율성 측면의 전략 과제로 인식되고 있는 셈이다.  

 

현재 실제 노동시간과의 상관관계도 드러났다. 주 52시간 이하로 근무하는 응답자 그룹은 찬성률이 80퍼센트를 넘어섰고, 주 52시간 초과 70시간 이하 그룹은 75퍼센트, 주 70시간을 초과해 근무하는 그룹은 71퍼센트가 찬성했다. 과로에 가까운 장시간 노동을 하는 집단에서조차 10명 중 7명 이상이 주 4점5일제를 지지하고 있어, 한국 노동시장에서 장시간 근로 관행이 경쟁력의 필수 요건이라는 인식은 약화되는 흐름으로 보인다.  

 

이미 주 4점5일제를 경험해 본 직장인의 평가도 수치로 제시됐다. 설문 참여자 가운데 해당 제도를 실제로 겪어 본 5398명을 별도로 분석한 결과, 이전과 비교해 생산성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한 질문에 52퍼센트가 생산성이 증가했다고 응답했다. 37퍼센트는 변화가 없다고 답했으며, 생산성이 저하됐다고 느낀 비율은 11퍼센트에 불과했다. 근로시간 단축이 곧바로 성과 저하로 이어진다는 통념과 달리, 일정 수준의 시간 압축은 집중도 향상과 불필요한 업무 축소를 유도해 생산성을 오히려 높일 수 있다는 인식이 적지 않은 것이다.  

 

무엇이 생산성 저하의 핵심 요인인지에 대한 질문에서는 노동시간보다 조직 구조와 문화에 대한 비판이 앞섰다. 응답자들은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조직 문화 문제와 비효율적 절차를 각각 23퍼센트로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이 16퍼센트, 업무 우선순위 혼란이 15퍼센트, 번아웃이 11퍼센트, 열악한 업무 환경이 7퍼센트 순이었다. 반면 노동 시간 부족을 생산성 저해 요인으로 지목한 비율은 5퍼센트에 그쳐 최하위에 머물렀다. 특히 이번 응답 패턴은 단순한 장시간 투입이 아니라 프로세스 혁신과 디지털 도구 활용 등 IT 기반 업무 효율화가 노동 정책의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설문 참여자들의 의견은 국제 비교를 통해 한국 노동환경의 방향성을 놓고 엇갈리는 인식을 드러냈다. 한림제약의 한 재직자는 블라인드 댓글에서 독일과 노르웨이와 같은 유럽 국가를 예로 들며, 주 30시간에서 34시간 정도의 짧은 근무시간에도 이들 국가의 노동 생산성이 한국보다 높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사람을 갈아 넣는 방식의 노동 구조로는 젊은 세대를 확보하기 어렵고, 장기적으로도 지속 가능한 모델이 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기술 집약 산업 비중이 높은 한국 경제가 고숙련 인력 확보 경쟁에 직면한 상황에서, 삶의 질을 중시하는 근로조건이 새로운 경쟁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시각이다.  

 

반대로 포스코 재직자로 소개된 또 다른 댓글 작성자는 중국의 이른바 996 문화, 즉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근무 체제를 언급하며 국가 경쟁력 관점을 강조했다. 중국이 철강, 자동차, 석유화학, 배터리 분야에서 이미 한국을 추월했다는 점을 들어, 중국 방식의 과도한 장시간 노동을 그대로 답습할 필요는 없지만, 산업 경쟁력 확보가 우선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같은 플랫폼 내에서도 노동시간 단축과 국가 경쟁력 사이의 균형을 놓고 합의가 형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번 설문을 진행한 블라인드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둔 직장인 소셜 플랫폼으로, 구성원의 목소리로 건강한 조직 문화를 만든다는 비전을 내세우며 2013년 한국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한국 300인 이상 기업 재직자의 86퍼센트가 블라인드를 사용하고 있고, 미국에서는 메타와 우버 등 주요 빅테크 기업 재직자의 80퍼센트 이상이 이 플랫폼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2월에는 인도 시장에 진출하면서 글로벌 확장을 본격화했다. IT 기반 직장인 커뮤니티가 단순 익명 게시판을 넘어, 노동시간 제도와 생산성 논쟁에 실증 데이터와 현장 목소리를 제공하는 인프라로 진화하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대규모 설문 데이터가 곧바로 정책 결정의 근거가 될 수는 없지만, 디지털 플랫폼을 매개로 한 현장 체감도의 변화를 보여 주는 지표로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주 4점5일제와 같은 근로시간 단축 논의는 산업 자동화 수준, 디지털 전환 속도, 글로벌 공급망 경쟁 등 IT와 제조, 서비스 전반의 구조 변화와 맞물려 있다. 산업계는 플랫폼에 축적되는 목소리가 실제 제도 설계와 기업 전략에 어느 수준까지 반영될지, 그리고 노동시간 단축이 장기적으로 한국 산업 경쟁력에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오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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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주4점5일제#한국직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