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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벗어나 숲으로 간다”…홍천에서 찾는 가을의 느린 하루

오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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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먼 해외 대신, 차로 두세 시간 거리에 있는 숲을 찾는 이들이 늘었다. 예전엔 긴 휴가에나 떠나던 자연 여행이었지만, 지금은 토요일 하루를 비워 도시 밖 풍경을 만나러 가는 일이 익숙한 주말의 선택이 됐다. 사소한 외출 같지만, 그 안에는 숨을 고르고 싶은 마음이 고요하게 자리한다.

 

강원 홍천은 그런 마음이 머물기 좋은 곳이다. 수도권에서 부담 없이 닿을 수 있으면서도, 길가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물 흐르는 소리 하나까지 도시와는 다른 속도를 품고 있다. 특히 가을이면 산과 숲, 강이 함께 어우러져 하루쯤 몸과 마음을 내려놓기 좋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홍천은행나무숲 출처 :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
홍천은행나무숲 출처 :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

홍천읍에 자리한 도시산림공원토리숲은 가볍게 걷고 싶은 이들에게 먼저 떠오르는 공간이다. 동네 공원처럼 편안하지만, 한 걸음만 더 들여다보면 계절의 결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정돈된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나뭇잎 색이 조금씩 달라지는 구간이 이어지고, 곳곳에 놓인 벤치에서는 사람들이 조용히 책을 읽거나 하늘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숲에 다녀온 기분’을 맛볼 수 있어, 짧은 오후 나들이로 찾는 이들이 많다.

 

숲의 깊이를 느끼고 싶다면 내면 광원리의 삼봉자연휴양림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잦다. 울창한 나무들이 햇빛을 걸러내며 만들어 준 그늘 아래를 걷다 보면, 공기에서 먼저 계절이 바뀐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멀리서 겹쳐 들려오는 새소리는 평소엔 잘 의식하지 못했던 감각을 깨운다. 한 여행객은 이곳을 다녀온 뒤 “숲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니, 머릿속이 조용해지는 느낌을 처음 알게 됐다”고 표현했다.

 

조금 더 활동적인 시간을 원하는 이들은 두촌면의 가리산으로 향한다. 기암괴석이 이어지는 산세는 보는 것만으로도 묵직한 인상을 남긴다. 가을 하늘이 높게 열린 날, 산길을 따라 천천히 오르다 뒤를 돌아보면 안개가 걷힌 홍천의 풍경이 넓게 펼쳐진다. 정상에 서면 사방이 열리며 산과 들, 마을이 하나의 풍경으로 이어지는데, 이 장면이 좋아 매년 같은 시기에 가리산을 찾는 이들도 있다. 사람으로 가득한 산행 대신, 조용히 걷고 서고 숨을 들이마실 수 있는 시간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다.

 

홍천의 가을을 상징하는 풍경으로 꼽히는 곳은 단연 홍천은행나무숲이다. 내면 광원리에 자리한 이 숲은 매년 10월 중순부터 한 달 남짓, 황금빛으로 물들며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수천 그루의 은행나무가 동시에 노래지는 순간, 숲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빛의 막처럼 느껴진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은 사진으로 다 담기지 않는 색을 만들어 내고, 바닥을 가득 메운 노란 은행잎을 밟는 발걸음은 예상보다 훨씬 부드럽다. 많은 이들이 “마치 영화 속 장면에 들어온 것 같다”고 털어놓는 이유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휴일마다 짧은 거리의 자연 여행을 떠나는 ‘마이크로 투어’가 하나의 일상 패턴으로 자리 잡았고, 강원권 소도시의 산림·휴양 공간 방문객도 꾸준히 늘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교통편이 좋아진 덕분에 마음만 먹으면 반나절 만에도 숲을 다녀올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의 여행 기준도 변하고 있다. 꼭 유명 관광지가 아니어도, 조용히 걷고 머물 수 있는 곳이라면 충분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여행 심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을 ‘리셋 여행’이라 부른다. 거창한 경험이나 화려한 사진보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초점을 둔 움직임이라는 뜻이다. 한 심리전문가는 “빡빡한 일상에서 벗어나 숲길을 걷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감정 정리 시간으로 작용한다”며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되는 짧은 자연 여행이 현대인의 피로를 풀어 주는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홍천을 찾은 이들의 반응도 비슷하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당일치기였는데도 며칠 쉰 느낌이었다”, “은행나무숲에서 한참을 서 있기만 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는 후기가 이어진다. 누군가는 아이와 함께 토리숲을 거닐며 잎사귀를 줍고, 또 다른 누군가는 삼봉자연휴양림의 숲속 벤치에 앉아 오랜만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낸다. 계획을 빼곡히 세운 여행이 아니라,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멈추는 여유가 더 환영 받는 분위기다.

 

홍천의 산과 숲, 계절이 내려앉은 길 위에는 지금, 바쁘게 달리던 사람들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가까운 곳으로의 짧은 이동이지만, 그 안에서 일상의 속도는 한 번쯤 느려진다. 도시를 벗어나 자연을 향해 한 걸음 옮기는 선택, 작고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의 삶은 그런 발걸음 속에서 조금씩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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