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파운데이션 모델로 조선 혁신…정부·HD현대 연합 가동
조선·해양 산업 전반에 인공지능을 입히려는 정부와 산업계, 학계의 대규모 연합이 출범했다. AI 파운데이션 모델과 피지컬 AI 등 최신 기술을 조선소 설계와 생산, 물류 공정에 본격 적용해 글로벌 초격차를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협력이 한국 조선 산업의 AI 전환을 본격화하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는 20일 울산과학기술원, HD한국조선해양, HD현대중공업, HD현대로보틱스, 울산대학교와 조선·해양 산업 인공지능 기술개발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국내 조선·해양 분야에서 정부와 빅3 조선사 계열, 지역 대학, 과학기술원이 동시에 참여하는 AI 전용 협력 체계가 구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협약의 핵심 골자는 조선·해양 산업에 특화된 AI 파운데이션 모델을 공동 개발하고, 이를 뒷받침할 데이터 생태계를 함께 구축하는 데 있다. 파운데이션 모델은 대규모 데이터를 학습해 설계 최적화, 공정 계획, 안전 진단 등 다양한 작업에 범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반 인공지능을 뜻한다. 조선·해양 분야에 맞춘 특화 모델을 확보하면 선박 구조 설계, 연료 효율 분석, 부식·피로 수명 예측 같은 고난도 영역에서 의사결정 정확도를 크게 높일 수 있다.
정부와 참여 기관은 조선·해양 산업의 디지털 전략자산을 공동으로 창출하고, 산업 지식과 생산 현장 데이터를 연계해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구체적으로는 설계 도면, 선박 운항 데이터, 작업자의 공정 노하우, 설비 센서 데이터 등을 통합해 AI 학습에 적합한 형태로 재구성하는 데이터 허브를 구축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이런 데이터 기반은 조선·해양 특화 대규모 언어모델, 시뮬레이션 최적화 모델, 예지정비 모델 개발의 토대가 될 수 있다.
AI 기술의 실질적 경쟁력은 현장 구현 능력에서 갈린다. 이번 협력에서 주목되는 부분이 피지컬 AI와 생산 자동화다. 피지컬 AI는 로봇, 센서, 제어 시스템과 결합해 실제 물리 환경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동작하는 인공지능 기술을 일컫는다. 조선소와 해양플랜트 건조 현장처럼 복잡하고 위험한 환경에서는 안전 확보와 생산성 향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핵심 수단으로 평가된다.
산업부는 용접과 도장 등 고숙련 작업자의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데이터화하고, 이를 학습한 AI 모델을 자동화 공정에 적용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예를 들어 용접 전문가가 수십 년간 축적해 온 비드 형상, 열 투입, 변형 제어 경험을 고해상도 영상과 공정 데이터로 기록한 뒤 AI가 이를 모사하고 최적화하는 구조다. 기존 규칙 기반 자동화보다 실제 작업 품질에 더 근접한 제어가 가능해질 수 있다.
또한 AI를 활용해 중대형 블록 생산을 자동화하고, 조선소 야드 내 물류 동선을 최적화하는 기술 개발도 병행된다. 대형 크레인, 운반 차량, 로봇 장비의 위치와 작업 순서를 AI가 통합적으로 계산해 대기 시간을 줄이고 병목 구간을 해소하는 방식이다. 산업부는 이런 피지컬 AI 기술들을 제조 AX 얼라이언스를 중심으로 업계와 협의하며 단계적으로 확보해 자율 운영 조선소 구현에 다가간다는 계획이다.
이번 협약에서 HD현대 그룹은 그룹 차원의 AI 대전환 전략과 연계해 조선·해양 분야 AI를 선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HD현대는 자체 추진 중인 마스가 프로젝트를 통해 선박과 조선소, 해양플랜트 전 주기에서 AI 기반의 설계, 생산, 운영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룹 내 HD한국조선해양, HD현대중공업, HD현대로보틱스가 각각 설계·엔지니어링, 생산 공정, 로봇·자동화 영역에서 역할을 분담해 시너지를 낼 전망이다.
연구·인력 측면에서는 울산과학기술원이 축 역할을 맡는다. UNIST는 그간 축적해 온 인공지능 연구 역량을 바탕으로 부울경 초광역권의 AI 혁신 거점기관으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선박 설계 최적화 알고리즘, 구조 해석과 AI 융합, 로봇 제어용 피지컬 AI 모델 등 고급 연구를 산업과 직결하고, 조선·해양 특화 AI 인재를 집중 양성하는 방향이다. 울산대 등 지역 대학과의 연계를 통해 산학 공동 교육과 현장 맞춤형 커리큘럼도 강화된다.
정부는 제도와 규제 측면에서 AI 전환을 뒷받침하겠다는 방침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AI 적용 연구개발 과정에서 데이터 수집과 활용을 가로막는 불합리한 규제를 발굴해 규제 샌드박스 등을 통해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로봇과 중장비, 자율 운반 장비가 뒤섞인 조선소 환경에서 피지컬 AI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려면 안전 규정, 데이터 보안, 통신 인프라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고 보고 관련 정책 지원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피지컬 AI 파운데이션 모델 구축 역시 정부 지원의 핵심 축이다. 실제 조선소 환경을 반영한 데이터 파이프라인을 제대로 구축해 대규모 시뮬레이션과 실시간 제어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센서 데이터 표준화, 디지털 트윈 기반 가상 조선소 구축, 엣지 컴퓨팅 인프라 고도화 같은 인프라 투자가 병행될 전망이다.
지역 균형 발전 측면에서도 이번 협약의 의미가 강조된다. 과기정통부는 UNIST를 포함한 지역 과학기술원이 조선·해양과 같은 지역 특화 산업의 인공지능 전환과 핵심 인재 양성에 집중할 수 있도록 관련 투자 확대, 우수 교원 확충, 연구 인프라 첨단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지역 산업과 대학, 연구기관이 함께 참여하는 AI 클러스터를 조성해 기술과 사람이 동시에 모이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글로벌 차원에서 보면 미국과 유럽, 일본은 이미 조선·해양 분야에 디지털 트윈과 AI 기반 최적화 기술을 도입하며 경쟁을 강화하고 있다. 선박 연료 전환과 탄소 규제 대응, 해양플랜트 안전 관리를 위해 설계와 운항 데이터의 연계 활용이 빠르게 확산되는 추세다. 한국이 이번 협약을 계기로 조선소 현장까지 아우르는 피지컬 AI 체계를 선점할 경우, 기존 건조 기술 우위에 데이터와 AI 경쟁력을 더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정통부 장관은 국내 조선·해양 산업이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겪고 있는 시점에서 이번 협약이 위기 극복과 기회 선점을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역 특화 산업을 기반으로 국가균형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AI 3대 강국 진입 목표를 앞당기는 대표 사례가 되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산업계는 조선·해양 분야 AI 전환 전략이 실제 현장에 안착해 생산성과 안전, 친환경 규제 대응력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기술과 인력, 제도가 맞물려 돌아갈 수 있는 실행력 확보가 향후 성패를 가를 핵심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