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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보며 면을 말아 먹는다”…가을 거제, 미식과 산책 사이에서 쉬어가는 법

박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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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를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다. 한 장소를 빠르게 훑고 떠나기보다, 한 도시 안에서 먹고 걷고 쉬는 흐름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어갈 수 있는지가 중요해졌다. 사소한 동선의 차이지만, 그 안에 ‘어떻게 잘 쉬고 싶으냐’는 달라진 마음이 담겨 있다.

 

가을의 거제는 이런 흐름을 천천히 따라가 보기 좋은 도시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굽이진 해안과 푸른 바다를 곁에 두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오래된 식당과 박물관, 해양 테마파크, 바다 카페가 촘촘하게 자리한다. 목적지를 여러 개 정하기보다, ‘오늘 하루 여기만 돌아볼까’ 하는 가벼운 계획으로도 충분하다.

거제 외도 출처 :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
거제 외도 출처 :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

먼저 점심 시간에 들르기 좋은 곳은 장승포동의 천화원이다. 1951년 문을 연 이 중식당은 세월의 겹이 쌓인 만큼 단골들의 이야기도 깊다. 여전히 화교 주인이 지키고 있는 주방에서는 탕수육, 팔보채 같은 요리가 여유롭게 볶아지고, 손님들은 자장면 한 그릇만 먹고 나가기보다 요리를 함께 시켜 천천히 점심을 이어 간다. 얇고 가늘게 뽑아낸 면 위로 자장 소스가 부드럽게 스며들고, 짬뽕 한 숟가락에는 국물보다 먼저 해산물 향이 올라온다. 특히 우동 스타일의 맑은 삼선짬뽕은 얼큰함 대신 담백한 바다 맛을 앞세운다. 투명한 국물 속으로 오징어, 새우, 조개가 푸짐하게 담겨 나와 ‘오늘 바다와 더 가까워졌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런 노포를 찾는 발걸음은 숫자로도 확인되는 변화와 맞닿아 있다. 여행지에서 프랜차이즈 대신 오래된 집, 로컬 맛집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고, 지도 앱 후기에는 “여기서만 먹을 수 있는 맛”을 기준으로 별점을 매기는 글이 쌓인다. 입맛만 채우는 식사가 아니라, 한 도시의 기억을 함께 맛보고 싶다는 욕구가 반영된 선택이다.

 

식후에는 남부면 갈곶리의 해금강 테마박물관으로 방향을 돌려 볼 만하다. 폐교된 초등학교 분교를 활용한 이 공간에 들어서면, 운동장 대신 잔잔한 시간의 냄새가 반긴다. 1층은 마치 오래된 영화 속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간판이 낮게 드리운 이발관, 만화책이 빼곡한 만화방, 빨랫비누 향이 어울릴 것 같은 세탁소, 둥근 탁자가 놓인 다방과 잡화점이 차례로 이어진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쓰이던 생활용품과 소품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방문객들은 전시를 본다기보다 골목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게 된다.

 

2층으로 올라가면 분위기가 한 번 더 바뀐다. 중세 범선 모형이 파도 대신 천장을 향해 돛을 올리고, 유럽 각지에서 온 밀랍인형과 도자기, 가면, 영화제 포스터들이 한 교실 안에 모여 있다. 교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시대와 대륙이 뒤섞여 있어, ‘여기서만 가능한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누군가는 “어릴 적 과학실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표현하고, 누군가는 “부모님 세대의 앨범을 직접 들어가 본 느낌”이라 적어 둔다. 여행 중 박물관을 찾는 이유가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라, 나와 다른 시대를 잠시 빌려 살아보는 체험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바다와 조금 더 가까이 머물고 싶다면 일운면 소동리의 거제씨월드가 또 다른 선택지가 된다. 이곳에서는 관람객이 단순한 구경꾼에 머물지 않는다. 벨루가가 수조 안을 느긋하게 유영하고, 돌고래가 수면 위로 몸을 들어 올릴 때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의 눈도 함께 반짝인다. 전문 사육사는 벨루가의 먹이 습관, 돌고래의 사회성, 행동 풍부화 프로그램의 의미를 설명하며 “이 아이들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환경을 계속 바꾸고 있다”고 표현한다.

 

돌고래 행동 풍부화 관찰 프로그램에서는 장난감과 놀이 도구를 활용한 돌고래의 호기심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다. 벨루가 생태 설명회에서는 북극 바다에서 살아가는 동물의 실제 환경과, 수족관 안에서의 생활 조건을 함께 들여다보게 된다. 야외에서 진행되는 돌핀 야외활동 관찰 시간에는 바다와 연결된 수역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돌고래들이 눈앞에서 물살을 가른다. 관람객들은 스마트폰을 들이대다가도 어느 순간 화면을 내리고, 물방울이 튀는 순간을 눈으로만 담아 두고 싶어 한다. 그런 마음의 움직임 속에서, 해양 동물을 향한 호기심이 서서히 책임감으로 바뀐다.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에는 장목면 시방리의 까페 구아나가 잘 어울린다. 넓게 열린 통유리창 너머로 서해 바다가 펼쳐지고, 햇빛이 기울수록 바다의 색은 천천히 파랑에서 주황빛으로 변한다. 실내는 군더더기 없는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어, 시선이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향한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파도 소리를 배경음악처럼 들으며 앉아 있다 보면, 여행이 아니라 ‘잠깐의 이사’를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카페 한편에는 사진을 찍기 좋은 작은 포인트들이 자리하지만, 많은 이들은 어느 순간 카메라를 내려놓고 창가 자리를 오래 붙든다. “가만히 있는 것도 여행의 일부”라는 말을 몸으로 실감하는 순간이다. 누군가는 노트북을 펼쳐 미뤄 둔 글을 정리하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바다만 바라본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자 다른 방식으로 쉬는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보면, 요즘 거제를 찾는 여행자들의 후기는 대체로 비슷한 결을 띤다. “생각보다 볼 게 많아서 천천히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바다만 보고 오려다가 박물관과 중식당 덕에 하루가 꽉 찼다”는 반응이 이어진다. 그만큼 이 도시는 거창한 관광 코스보다는, 하루 일과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선을 제안한다. 점심에는 70년 노포에서 국물을 비우고, 오후에는 폐교 박물관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바다 동물과 눈을 맞춘 뒤, 저녁에는 카페 창가에 앉아 노을을 배경 삼아 하루를 정리하는 식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여행 방식을 ‘리듬을 되찾는 여행’이라고 부른다. 빡빡한 일정으로 유명 스폿만 찍고 지나가는 여행보다, 한 도시의 생활과 숨을 맞춰 보는 느린 여행을 선호하는 이들이 늘어났다는 의미다. 먹고, 보고, 쉬는 행위를 촘촘히 계획하기보다, 그날의 기분과 날씨에 따라 순서를 바꾸는 여유를 남겨 두는 쪽을 선택한다.

 

가을 거제의 하루는 그렇게 완성된다. 바다를 옆에 둔 채 그 도시가 지켜 온 맛을 한 입씩 떠 보고, 오래된 교실을 걸으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해양 생명체와의 눈맞춤을 통해 다른 존재들의 삶을 상상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자신만의 속도로 숨을 고른다. 작고 사소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런 하루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이번 가을, 거제에서의 여정은 어쩌면 누구나 겪고 있는 ‘나의 이야기’를 조금 더 또렷하게 듣게 해 줄지도 모른다.

박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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