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습으로 피부장벽 회복”…WHO, 아토피 관리 새 기준 제시
아토피 피부염 관리 패러다임이 ‘보습을 통한 피부 장벽 회복’으로 재정렬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염증을 빠르게 가라앉히는 스테로이드 치료만으로는 재발을 막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 임상과 국제 가이드라인에서 동시에 확인되고 있어서다. 세계보건기구 WHO가 특정 성분 조합의 보습제를 필수의약품으로 포함하면서, 보습 중심의 장기 관리 전략이 아토피 치료의 핵심 축으로 부상하는 양상이다. 업계와 의료계에서는 이번 조치가 향후 소아용 스테로이드 의존도를 낮추고, 피부 장벽 회복을 중심에 둔 치료제·의료기기 개발 경쟁에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12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국내 아토피 피부염 환자는 2023년 기준 약 100만명 규모로 추산된다. 성인 유병률은 3~7% 수준이지만 소아 유병률은 20%에 이른다. 심한 가려움과 극심한 건조, 수면 장애를 동반하는 대표적 만성 염증성 피부질환으로, 조기 치료가 이뤄지지 않으면 장기화와 재발이 반복되기 쉽다.

나정임 분당서울대학교병원 피부과 교수는 최근 피에르파브르가 개최한 덱세릴MD크림 제형의 WHO 필수의약품 등재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아토피 피부염의 발병 기전과 치료 전략을 설명했다. 나 교수에 따르면 아토피 피부염은 2형 면역 반응이 과도하게 활성화되는 면역 이상과 피부 장벽 손상이 맞물리며 발생한다. 피부 장벽이 깨진 상태에서 2형 면역 반응이 높아지면, 면역 매개 물질이 다시 장벽을 손상시키는 악순환이 이어져 증상이 점점 심해진다.
나 교수는 소아기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어릴 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할 경우 성인기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방치된 피부염이 비염, 천식 등 다른 알레르기 질환으로 진행될 위험도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아이가 아토피라면 곧바로 약을 발라 초기 염증을 잡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다만 스테로이드 도포제 등 항염증 약제를 사용해 일차적으로 염증 반응을 중지시키더라도 재발이 잦다는 점은 현장 의료진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한계다. 나 교수는 “피부 장벽이 여전히 망가져 있으면 다시 2형 면역 반응이 활성화되며 증상이 되돌아간다”며 “재발을 막지 못했던 핵심 이유가 피부 장벽의 완전한 회복까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국내에서 2세 이하 소아 아토피 피부염 환자에게 허가된 약제는 스테로이드 도포제가 사실상 유일하다. 스테로이드는 염증을 빠르게 줄이는 장점이 있지만 장기간 사용 시 피부가 얇아지고 장벽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나 교수는 “염증 조절을 스테로이드에만 의존할 경우, 단기 효과는 좋지만 장벽 자체는 오히려 나빠질 수 있어 보습제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WHO는 지난달 개정한 필수의약품목록 EML과 소아필수의약품목록 EMLc에 글리세롤 15~20퍼센트, 화이트 소프트 파라핀, 리퀴드 파라핀 조합의 보습제를 아토피 피부염 관리에 유효한 의약품으로 새로 포함했다. 업계에서는 해당 조성 제형이 피에르파브르의 보습제 덱세릴MD크림과 동일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필수의약품 등재는 저소득국을 포함한 각국 보건당국의 의약품 조달 기준이 되는 만큼, 향후 글로벌 시장에서 동일 계열 보습제의 접근성과 사용 확대를 촉진할 수 있는 신호로 여겨진다.
김현정 가천대학교 길병원 피부과 교수는 WHO의 결정을 두고 “보습을 통한 피부 장벽 관리가 아토피 피부염을 포함한 만성 피부질환 전반의 관리에서 중요한 축임을 국제적으로 인정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이어 “피부 장벽 관리의 중요성에 대한 글로벌 합의가 확대되고 있고, 향후 가이드라인과 보험 정책 도입에서도 보습 전략의 비중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나 교수는 실제 임상 현장에서 확인한 보습 병용 효과도 제시했다. 양측 팔에 대칭적으로 병변이 있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쪽에는 스테로이드 치료제만, 다른 한쪽에는 스테로이드와 덱세릴MD크림을 함께 도포하는 방식으로 중증도 변화를 비교했다. 그 결과 스테로이드 단독군의 아토피 피부염 중증도는 14.4퍼센트 감소에 그친 반면, 덱세릴 크림 병용군은 24.5퍼센트 감소해 개선 폭이 더 컸다. 단기 염증 조절 단계에서도 장벽 관리 여부가 실제 증상 개선 정도에 영향을 준 셈이다.
재발률 차이는 더 뚜렷했다. 덱세릴 크림을 유지해 사용한 군에서는 45명 중 1명만 재발한 반면, 대조군에서는 6명이 재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토피 증상이 갑자기 심해지는 플레어 발생도 보습 병용군에서 의미 있게 줄었다. 플레어는 소아 환자와 보호자의 치료 순응도에 큰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재발 및 악화의 핵심 지표로 꼽힌다.
해당 데이터는 5개국 27개 센터에서 진행된 무작위 대조 임상시험 결과다. 2세에서 6세 사이 소아 아토피 피부염 환자 335명이 참여해, 12주간 보습제 사용 여부에 따른 플레어 재발률을 추적했다. 보습제를 쓰지 않은 환자군의 플레어 재발률은 67.6퍼센트에 달했다. 이에 비해 덱세릴 크림을 사용한 환자군의 재발률은 35.1퍼센트로 절반 수준에 머물렀다. 추가 분석에서는 보습제를 병용할 때 스테로이드나 면역 조절제 사용량도 줄어드는 경향이 관찰됐다.
나 교수는 “덱세릴 크림과 국소 도포제를 함께 사용하는 전략이 단기 염증 조절 효과를 높이는 동시에 약 사용 빈도와 총량을 줄이고, 재발과 플레어를 예방하는 효과까지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스테로이드 의존도를 낮추면서 장기 관리 관점에서 치료 부담과 부작용 우려를 완화할 수 있는 조합요법 옵션이라는 해석이다.
제약바이오업계에서는 WHO의 필수의약품 등재를 계기로 피부 장벽 회복을 전면에 내세운 보습제와 의료기기, 디지털 모니터링 솔루션 개발 경쟁이 더 빨라질 수 있다고 본다. 장기 복용 약물이 아닌 외용 보습제 중심이어서 규제 진입장벽이 상대적으로 낮고, 유아·소아 시장이 크기 때문에 글로벌 업체와 국내 중소 바이오 기업 모두에게 새로운 성장 영역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다만 전문가들은 단일 제형이나 특정 브랜드 효과보다는, 스테로이드와 면역 조절제, 보습제, 환경 관리까지 아우르는 통합 관리 프로토콜이 실제 환자 예후를 좌우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장기 데이터를 바탕으로 연령대별, 중증도별 최적 조합과 사용 기간을 세분화하는 후속 연구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국내에서는 아직 소아 보습제 사용에 대해 별도 급여 기준이 명확히 마련되지 않은 만큼, 향후 건강보험 제도와 진료지침 개편 과정에서 WHO 결정이 참고점으로 작용할 여지도 있다. 의료계와 산업계는 피부 장벽 회복을 중심에 둔 아토피 관리 전략이 실제 일차의료 현장과 보험 체계에 얼마나 빠르게 안착할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