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포에서 호미곶까지”…포항, 흐린 하늘 아래 동해의 시간을 걷다
요즘은 흐린 하늘을 등지고 동해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쾌청한 일출만을 기다리던 때와 달리, 잿빛 구름과 바닷바람 사이를 거니는 일이 포항의 일상이 됐다. 하늘이 흐릿한 9월의 어느 아침, 동북동풍이 스쳐가는 포항 거리에는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시간의 풍경이 흐른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는 마치 시간이 멈춘 골목 같다. 붉은 벽돌과 목조 건물이 뒤섞인 이국적인 풍경, 옛 상점들의 흔적, 그리고 카페와 공방이 조용히 들어선 거리. 여행자들은 이곳을 거닐다 보면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나라의 오래된 기억을 만나는 듯한 감각에 젖는다. SNS에서는 그리움 담긴 풍경 사진이 이어지고, “구름 낀 바다와 빛바랜 골목이 오히려 더 멋지다”는 반응도 이어진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일출 시즌 외에도 계절과 날씨에 상관없이 포항을 찾는 이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연령대 역시 30~50대가 중심이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나만의 골목여행’을 꿈꾸는 20~30대 방문객도 크게 늘었다. 동해안 ‘감성 산책로’가 인생사진 명소로 부상하면서, 흐린 날씨마저도 여행의 배경이 되는 식이다.
호미곶해맞이광장은 동해의 기운을 느끼는 대표 명소다. 육지와 바다를 잇는 ‘상생의 손’ 앞에 서면, 거센 바람과 동시에 고요가 깃든다. 여행 칼럼니스트 김하늘 씨는 “해변을 가만히 걷다 보면 바다가 내 마음을 닮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며, 바람 많고 흐린 날의 동해가 주는 고유의 감성에 주목했다.
보경사는 산 아래 숲길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 도심의 소음을 잊게 하는 절집이다. 천년의 세월을 머금은 전각과 경내 풍경, 그리고 계곡물과 폭포 소리가 마음 깊은 곳을 적신다. 익명의 여행자는 “비 갠 숲길을 따라 걷는 동안, 오래된 사찰에서 들리는 풍경 소리에 스스로를 내려놓게 된다”고 경험을 전했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오히려 더 그림 같다”, “포항은 날씨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곳”이라는 이야기들이 입소문을 타고 있다. 예상하지 않은 날씨와 변덕스러운 바람도, 그 자체로 여행의 일부가 된 셈이다.
포항의 바다는 늘 같은 곳을 향해 흐르지만, 그 아래 펼쳐지는 풍경은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된다. 흐린 날의 구룡포 골목과 호미곶 해변, 그리고 보경사의 고요한 기운은 단지 여행이 아니라, 일상에 작은 쉼표를 찍는 순간이 되고 있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