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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문제, 미국 승인 기다려선 안 풀린다”…정동영, 평화경제 해법 제시

오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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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 구상과 한미 공조 원칙 사이에서 외교적 긴장이 다시 자리 잡고 있다. 통일부와 전문가들은 남북관계 교착이 장기화된 상황에서 미국 중심 사고를 넘어선 자기결정권, 그리고 제3국을 활용한 평화경제 전략을 동시에 주문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25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 호텔에서 열린 한반도 평화경제 미래비전 국제세미나에서 "미국의 승인과 결재를 기다리는 그러한 관료적 사고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한반도 문제의 특성"이라고 말했다. 한반도 문제의 특수성을 강조하며 한국 정부의 주도적 역할을 거듭 상기한 발언이다.  

정 장관은 1998년 11월 김대중 정부 시절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도 금강산 관광 첫 출항 일정을 예정대로 밀어붙였던 사례를 소개했다. 당시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이 제기돼 미국 측에서 한국의 금강산 관광 일정을 조정하길 바라는 기류가 있었고, 국내 일부에서도 클린턴 대통령 방한 이후로 출항을 늦추자는 의견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금강산 관광 첫 출항 일정을 고수했다. 정 장관은 이를 두고 "한반도 문제의 자기중심성, 자기결정권을 강조한 것"이라고 평가하며, 한국 정부가 한반도 현안을 스스로 조율할 수 있는 외교적 자율성을 갖춰야 한다고 부연했다.  

 

정 장관의 발언은 이날 오후 예정된 케빈 김 주한미국대사대리 접견을 앞두고 나왔다. 한미 공조를 유지하되, 남북관계와 평화경제 구상에 대해 한국이 보다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겠다는 의지를 에둘러 드러낸 셈이라는 해석도 뒤따랐다.  

 

정 장관은 또 중국과 대만의 교류를 언급하며 남북관계의 단절 현실을 비교했다. 그는 "중국과 대만의 교류가 중국의 영토평정 위협 속에서도 그 질과 양이 깊고 넓어지고 있다"고 지적하며, 군사적 긴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교류를 확대해 온 중대 관계와 대조적으로 남북 교류는 끊겨 있다고 진단했다.  

 

정 장관은 "불일불이, 하나도 둘도 아닌 상태, 그 속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은 평화경제의 길"이라고 말했다. 이어 "2026년에는 한반도 평화공존, 화해협력의 신원년이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교착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남북 경제 협력과 교류의 통로를 다시 열어야 한다는 메시지로 해석됐다.  

 

세미나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제재 국면 속에서 한국이 참여 가능한 우회로와 다자 협력 구상을 제시했다. 임수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남북경협은 당분간 추진이 어려우니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제3국이 주도하는 양자·다자 개발협력사업에 참여하고 점차 주도권을 확대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임 책임연구위원은 유엔 제재 체제하에서 이미 허용됐거나 규정의 빈틈이 존재하는 사업들을 구체적으로 꼽았다. 그는 북중 수력 인프라 사업, 나진 하산 프로젝트 주관사인 북러 합자 나선 콘트라스 사업, 북극항로와 연계한 나진항·선봉항 개발 등을 한국이 참여 가능성을 모색해볼 수 있는 사업으로 제시했다.  

 

또한 임 책임연구위원은 광역두만강개발계획 GTI가 향후 국제기구로 재편될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는 "앞으로 국제기구화가 예상되는 광역두만강개발계획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면서, 동북아 다자개발 플랫폼에서 한국이 중심적 역할을 차지해야 한반도 평화경제 전략도 힘을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는 남북미 다자협력을 모색할 수 있는 상징적 공간이라며 전략적 활용을 주문했다.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도 기조강연에서 금강산과 원산갈마를 연계한 관광사업, 신재생에너지 및 녹색협력 분야를 한반도 평화경제의 마중물로 제시했다. 그는 남북이 비교적 정치적 부담을 줄이면서도 상호 이익을 나눌 수 있는 실질적 협력 분야라고 설명했다.  

 

김 전 장관은 특히 북한의 선택을 주목했다. 그는 "북한이 원산갈마의 성공을 바란다면 남한 관광객을 무시하기 어렵다"고 지적하며, 남측 수요를 고려하지 않는 관광 전략은 한계가 뚜렷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금강산 관광을 둘러싼 불신을 해소하는 조치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과 관련한 안전조치 문제를 다시 꺼냈다. 김 전 장관은 "금강산 관광객 총격 사건의 재발 방지대책이 17년이 흐른 현재에도 유효한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북한이 아무런 협의 없이 철거한 금강산 남측 시설물 문제도 지적하며 "북한이 아무런 협의도 없이 철거한 금강산 남측 시설물에 대한 재산권 침해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한반도 평화경제를 둘러싸고 한국 정부의 주도권, 미국과의 공조, 대북 제재 체제, 제3국 및 다자개발 플랫폼 활용 방안이 집중 논의됐다. 통일부와 전문가들은 남북 경색 국면이 장기화할수록 외교적 자율성을 확보하되, 국제 규범과 제재 틀을 준수하는 현실적 해법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정치권에서는 향후 통일부의 대북정책 방향과 한미관계 조율 방식에 대한 논쟁이 재점화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평화경제 구상과 제3국 개발협력 구체화를 병행 검토할 예정이며, 국회는 관련 예산과 법제 지원 방안을 다음 회기에서 본격 논의에 나설 계획이다.

오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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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김대중정부#금강산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