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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통역방송 품질지침 추진…방미통위, 장애인 미디어권 강화

송다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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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어통역방송의 품질을 둘러싼 농인 시청자들의 불만이 커지는 가운데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가 제도적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양적 확대 단계에서 벗어나 품질과 수용자 경험을 정교하게 다듬는 방향으로 정책 축을 옮기려는 흐름이다. 장애인방송 편성 의무가 도입된 지 10년을 넘긴 시점에서 수어통역 속도 불일치, 작은 통역 화면 등 구체적인 불편이 누적되자, 당사자와 현장 통역사, 방송사가 함께 해법을 모색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업계에서는 향후 실무지침 제정이 우리나라 장애인 미디어 접근권 정책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방미통위는 시청자미디어재단과 함께 19일 서울에서 2025 한국수어통역방송 품질 향상 종합세미나를 열고 한국수어통역방송의 현주소와 개선 방향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2011년 장애인방송 편성의무 제도 도입 이후 수어통역방송 편성량은 크게 증가했지만, 현장에서는 내용 전달 정확도와 시청 편의성 등 질적 측면에서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첫 번째 세션에서는 농인 시청자 시각에서 본 수어통역방송의 문제점이 집중 제기됐다. 대안교육기관 소리를 보여주는 사람들 학생 정가은 씨는 농인가족의 실제 시청 경험을 토대로 방송 내용 전개 속도와 수어통역 속도가 맞지 않아 내용 이해에 어려움이 발생하는 사례, 수어통역 화면이 지나치게 작아 표정과 손동작을 읽기 어렵다는 점 등을 구체적으로 짚었다. 정보 접근의 형식적 보장이 아닌, 실질적 이해 가능성이 핵심이라는 메시지다.

 

전문가들은 통역사 역량 강화와 제작 현장 표준화가 병행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변강석 강남대 교수는 농인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 수어통역사 교육을 체계화하고, 방송제작 현장에서 참고할 수 있는 구체적 지침서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프로그램 유형별 통역 원칙, 화면 배치와 크기, 자막과의 조합 방식 등을 표준화해 제작 편차를 줄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두 번째 세션에서는 방송 현장에서 활동 중인 수어통역사들이 실무 관점의 문제와 대응 사례를 공유했다. 김유미 수어통역사는 생방송과 녹화방송처럼 전달 시간이 제약되는 유형, 뉴스·예능·다큐멘터리 등 장르에 따라 통역 전략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소개하며, 실시간 상황 변화에 맞춰 의미를 압축하거나 반복 설명을 조정하는 실제 방식을 설명했다. 프로그램 속도와 화면 구성, 대본 사전 공유 여부에 따라 통역 품질이 크게 달라진다는 점도 지적됐다.

 

김언경 수어통역사는 수어통역방송의 질을 높이려면 통역사 개인 역량뿐 아니라 제작환경 개선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촬영 스튜디오 내 통역 공간 확보, 카메라 구도와 조명 설계, 충분한 리허설 시간 등이 갖춰지지 않으면 농인 시청자가 요구하는 수준의 전달력이 확보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장애인방송의 중요성을 사회 전반이 인식하지 못하면 예산과 인력 배치에서 우선순위를 확보하기 어렵다며, 공감대 형성이 정책 추진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종합토론에서는 향후 수어통역방송 정책의 기준이 될 세 가지 원칙이 제시됐다. 수용자 중심, 한국수어 중심, 의미 중심이 그것이다. 수용자 중심 원칙은 수어통역사나 방송사 편의보다 최종 수용자인 청각장애인의 이해 가능성과 시청 경험을 우선해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수어 중심 원칙은 한국수화언어법에 따라 농인의 고유 언어로서 한국수어를 존중하고, 구어 직역이 아니라 수어 문법에 맞는 표현을 사용하는 방향을 지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의미 중심 원칙은 말 한마디도 빠짐없이 옮기는 형식적 통역보다, 시청자가 전체 맥락과 핵심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내용을 재구성해 전달하는 방식을 권장하는 개념으로 설명됐다.

 

토론에 참여한 패널들은 이러한 원칙이 현실에서 작동하려면 장애 당사자, 수어통역사, 방송사, 정부가 상시적으로 협력하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농인 시청자가 품질 평가와 모니터링 과정에 참여하고, 방송사가 제작 단계부터 수어통역을 전제로 기획을 조정하며, 정부가 가이드라인과 예산 지원을 통해 최소 기준을 보장하는 삼각 협력이 중요하다는 의견이다.

 

방미통위는 이번 세미나 논의 결과를 토대로 내년 상반기 중 한국수어통역방송 실무지침을 마련할 계획이다. 장애인방송 편성 비율 같은 양적 기준을 넘어, 화면 구성·음성 대사와 수어의 타이밍·통역 정확도와 표현 원칙 등 세부 항목을 담은 품질 기준을 제도화하는 방향이 검토되고 있다. 방미통위는 해당 지침을 국정과제인 미디어 공공성 회복과 미디어 주권 향상의 일환으로 제시하며, 향후 방송사 평가와 지원 정책에도 연계할 방침이다.

 

장애인 미디어 접근권이 단순한 편성 의무를 넘어 콘텐츠 품질 경쟁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는 가운데, 이번 실무지침이 실제 방송 제작 현장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지에 방송·장애인 단체 모두가 주목하고 있다.

송다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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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한국수어통역방송#시청자미디어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