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주고 수사해도 산재 안 줄어"…이재명, 산업역군 초청해 일터 안전 역설
산업 현장의 피로 사회가 버티고 있다는 인식과 청와대의 위기감이 다시 맞붙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무역의날을 맞아 산업 현장 노동자들을 초청해 경제와 민주주의, 일터 안전을 한꺼번에 꺼내 들며 정국의 또 다른 쟁점을 예고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조선·자동차·섬유·전자·기계·방산·해운 등 제조업과 수출 영역에서 오랜 기간 일해 온 노동자와 기술자 등 이른바 산업 역군 90여명을 초청해 오찬을 했다. 무역의날을 계기로 현장 노동자들을 재조명하고 경제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데 대한 감사를 전하는 자리였다.

소년공 출신인 이 대통령은 모두발언에서 경제력이 한국 민주주의와 문화 경쟁력의 뿌리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민주주의든 문화 역량이든 다 경제력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산업 역량, 과학기술 역량, 제조 역량 등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힘 그 자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의 궤적을 언급하며 민주주의 성취의 기반에 산업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식민지 해방 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낸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라며 "(비상계엄 사태를) 평화롭게 이겨내고 다시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전 세계로부터 '역시 놀라운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문화 영역과 관련해서도 경제력과 산업 기반을 연결 지었다. 이 대통령은 "여러분은 '케데헌 등으로 문화가 좀 인정받는 모양이네'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제가 순방을 다녀보면 그 이상으로 대한민국은 정말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말하며, 해외 순방 경험을 근거로 한국 문화의 위상이 경제·산업 성취와 맞물려 평가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오찬에는 1973년 6월 9일 포스코 제1고로에서 첫 쇳물을 뽑아낼 당시 현장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던 이영직 당시 포스코 토건부 차장, 1982년 대우어패럴에 입사한 구로공단 1세대 여성 노동자이자 현재까지 미싱사로 일하며 노동운동에 참여 중인 강명자 씨, 선박 도장 분야에서 대를 이은 노동자 백종현·백승헌 부자, 지상화기 17종 국산화에 기여한 박정만 씨, 초기 파독 광부로서 현지 기술력을 국내에 전수한 심극수 씨 등이 참석했다.
이 대통령은 특히 섬유 공장에서 일해 온 강명자 씨에게 각별한 공감을 표시했다. 그는 "저도 미싱 시다도 해보고, 미싱의 원재료를 손질하는 재단사 일도 해봤다"며 "미싱사들이 꼬박꼬박 졸다가 손톱을 미싱 바늘에 찔리는 장면도 봤다"고 말해 자신의 소년공 경험을 소환했다. 대통령이 과거 공장 노동 경력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현장 노동자들과의 거리감을 줄이려는 행보로 해석됐다.
경제 상황과 관련해 이 대통령은 바닥을 찍었다는 인식을 전하면서도 성장 동력 확충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경제 바닥 찍고 상향추세 돌아섰지만 더 성장해야 한다"며 "공정성장 중요하다"고 말해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도모하겠다는 기조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발언의 무게 중심은 산업 재해 문제에 실렸다. 이 대통령은 "왜 산업현장에서 죽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나. 대형 사업장에서는 산재사고 사망자가 줄었다는데 소형 사업장은 오히려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제가 압박하고, 겁도 주고, 수사도 해보고, 야단도 쳐보고 하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말해 강도 높은 지도·감독에도 불구하고 산재 감소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토로했다.
이 대통령은 "떨어져서 죽었다, 기계에 끼여서 죽었다, 졸다가 죽었다 등의 보고가 매일 올라온다"고 현장 상황을 전하며 "여전히 일터가 참혹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이 다른 건 다 선진국인데, 이런 부문에서는 참 후진국"이라고 언급해 산업 안전 분야를 선진국 위상과 대비되는 취약 지대로 규정했다.
그는 "노동자의 피땀으로 대한민국을 오늘 이 자리까지 끌어왔는데, 앞으로는 더 선진화가 돼야겠다"며 "일터에서 죽거나 다치는 분들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산재 예방을 국정의 핵심 과제로 놓고, 산업안전 제도와 현장 문화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의지를 재차 드러낸 발언으로 풀이된다.
대통령실도 브리핑을 통해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산재를 줄이는 데 있어 노력하는 만큼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이 대통령이 늘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그럼에도 대통령실과 고용노동부 모두 산재를 줄이고자 대책을 강구하며 애쓰고 있다"고 덧붙였다.
청와대와 대통령실의 인식에 비춰볼 때, 향후 정부는 소형 사업장과 하청·파견 등 취약 고용구조를 중심으로 산업안전 규제와 지원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조정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안전 규제 강화 과정에서 중소기업과 영세 사업장의 부담 논란이 다시 부각될 수 있어, 국회와의 입법 협의 과정에서 여야 간 공방도 재점화될 전망이다.
이날 청와대는 무역의날을 맞아 산업 역군과의 오찬을 통해 경제와 민주주의, 문화, 노동 안전을 하나의 축으로 묶어내는 메시지를 내놨다. 정치권은 향후 산업재해 대책과 관련 법·제도 개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의를 이어갈 것으로 보이며, 국회는 다음 회기에서 산재 감축과 산업안전 강화를 위한 입법과 예산 심의에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