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하늘 아래 고즈넉한 길”…안동의 오래된 풍경에서 쉼을 찾다
여행이란 늘 떠남이자, 어딘가를 다시 바라보는 일이 됐다. 요즘엔 숨 가쁜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히 시간의 결을 느낄 수 있는 도시로 향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흐리고 비 내리는 9월의 안동, 선선한 가을비가 대지를 적시는 이 도시는 누군가에겐 잊혀진 유적이 아니라, 나직한 쉼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안동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 불린다. 도산서원, 만휴정, 봉정사—각기 다른 시대와 기억을 품은 곳들이 고요히 기다린다. 오후의 짙은 구름 아래, 도산서원 앞 고목 밑을 걷던 한 여행자는 “비 내리는 길을 걸으며 퇴계의 시간에 잠시 머무른 기분”이라 표현했다. 주변의 느린 산세, 계곡물 흐르는 소리, 서원의 나즈막한 곡선까지 모두가 잠시 멈춤의 순간을 선물해준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안동시와 인근 지역의 관광객 추이에 따르면, 팬데믹 이후 산사나 서원, 누각 등 조용한 로컬 명소를 찾아 나선 방문객이 꾸준히 늘었다. 통계청 조사에서도 도심에서 멀어진 여행, 자연과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공간에 대한 선호가 뚜렷하다. 세대별로는 30~40대뿐 아니라 홀로 여행하는 2030 세대의 비중도 높아진다. “식상한 테마파크 대신 작은 고택이나 사찰, 서원을 일부러 찾는다”는 목소리가 커진 이유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여행의 목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제는 사진 한 장보다, 나 자신만의 속도로 정취를 만끽하는 체험에 의미를 둔다”고 봤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 한 관계자는 “본연의 시간이 흐르는 공간에 머물며, 도시에서 잊고 있던 평온함에 닿으려는 심리적인 움직임”이라 진단했다.
커뮤니티 반응도 흥미롭다. “안동 갔다 왔더니 맑은 공기와 고요함이 한동안 머릿속에 남는다”, “비 내리는 봉정사에서 혼자 산책하다가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돌아왔다”는 후기들이 SNS에 잇달아 올라온다. 누군가는 도산서원 앞 오래된 돌계단에서, 누군가는 만휴정 누마루에 앉아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숨을 고른다. 일상으로 복귀한 뒤에도 “그때 그 풍경만큼은 마음속에 남았다”고 공감한다.
실제로 기자가 도산서원과 만휴정을 차례로 거닐어 보니—빠른 걸음에 익숙해진 몸이 처음엔 어색하다. 하지만 도시의 소음을 잠시 내려놓을수록, 천천히 걸으며 하나하나 오래된 돌과 나무, 산사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에 마음이 묶인다. 달라진 여행에는 관찰의 틈, 느림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이제 사람들은 북적임과 속도 대신 고요한 정취, 내면의 시간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과거에는 풍경을 빨리 카메라에 담으려 애썼지만, 지금은 한참 앉아 있어도 심심하지 않다”는 여행자의 말처럼, 안동의 흐린 하루는 작은 멈춤과 느림에서 오는 평온을 알려준다.
지금 이 변화는 누구나 겪고 있는 ‘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작고 사소한 방황도, 천천히 걷는 안동의 길 위에선 삶의 쉼표가 된다. 여행은 끝났지만, 그날의 마음은 여전히 우리 안에 고요히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