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컴 총동원 AI 국가전략"…미국, 제네시스 미션으로 연구혁신 노린다
인공지능이 국가 전략산업의 판도를 재편하는 도구로 부상하면서 미국 정부가 연방 차원의 초대형 AI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통해 정부 보유 슈퍼컴퓨터와 공공 데이터세트를 하나로 묶어 폐쇄형 AI 플랫폼을 구축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백악관은 이번 이니셔티브를 1960년대 유인 달 탐사에 비견되는 아폴로급 과학 프로젝트로 규정하며, 생명공학과 에너지, 반도체 등 핵심 산업의 연구개발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목표를 내세운다. 동시에 AI 전력소비 급증과 규제 갈등을 둘러싼 정치적 부담이 커지면서, 기술 드라이브와 제도 조정이 맞물린 복합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24일 미국 에너지부를 중심으로 제네시스 미션을 공식 출범시키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핵심은 국가 연구소들이 보유한 슈퍼컴퓨터 인프라와 연방 정부가 축적한 방대한 과학·공학 데이터를 통합해, 과학용 기초 모델을 학습시키고 로봇 실험실을 구동하는 폐쇄형 AI 플랫폼을 만들라는 지시다. 그동안 연방 정부 데이터는 부처별로 분산되고 정제 수준도 제각각이라 민간 AI 기업이 체계적으로 활용하기 어려웠는데, 이번 조치로 데이터 공유 장벽을 줄여 고성능 AI 연구에 직접 투입하겠다는 계산이다.

백악관 설명에 따르면 제네시스 미션의 기술적 중심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미국 에너지부 계열 연구소가 보유한 페타플롭스급 슈퍼컴퓨터를 단일 가상 인프라처럼 묶어 대규모 AI 모델을 학습시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동 실험 플랫폼, 이른바 로봇 실험실에 이 AI를 결합해 실험 설계와 수행, 분석을 자동화하는 폐쇄형 연구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 이를 통해 분자 구조 탐색, 신소재 조성 추천, 에너지 시스템 최적화 같은 복잡한 탐색 문제를 기존 대비 수십 배 빠른 속도로 시뮬레이션하는 구상이 반영된다. 미국 정부는 이렇게 생성된 기초 모델을 공학, 에너지, 국가 안보 과제를 해결하는 범용 엔진으로 삼겠다는 계획이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는 AI 모델 학습에 쓰이는 데이터를 공공 부문 깊숙한 곳까지 확장한다는 점에서 기존 민간 주도의 초거대 AI와 궤를 달리한다. 국가 안보 관련 정보를 포함한 고위험 데이터까지 대상으로 삼되, 민간 슈퍼컴퓨터 자원까지 동시에 활용하겠다는 점에서 사실상 미국 내 최고 수준의 연산자원과 보호된 데이터를 한데 모으는 구조다. 백악관 관계자들은 보안 구역에서 작동하는 폐쇄망 AI 플랫폼으로 설계해 외부 유출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데이터 접근 권한과 로그 기록을 엄격히 관리하는 기술적 통제 장치를 병행하겠다고 강조한다.
산업적 활용 측면에서 제네시스 미션이 겨냥하는 분야는 폭넓다. 공식적으로 제시된 중점 연구 영역은 생명공학, 핵심 소재, 핵분열 및 핵융합 에너지, 우주 탐사, 양자 정보 과학, 반도체와 마이크로전자공학 등이다. 생명공학에서는 단백질 구조 예측과 대규모 분자 스크리닝을 AI와 로봇 실험실에 맡겨 후보물질 도출 속도를 높이고, 에너지 분야에서는 플라즈마 거동 시뮬레이션이나 전력망 부하 예측 모델을 고도화해 효율을 끌어올리는 시나리오가 거론된다. 반도체와 소재 연구에서는 원자 단위 구조 설계와 제조 공정 조건 탐색을 동시에 수행해, 공정 최적화를 단축하는 역할도 기대된다.
정부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연방 연구 개발의 생산성 자체를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연구자가 논문과 데이터를 수동으로 수집하고 실험 조건을 일일이 설계했다면, 제네시스 미션이 지향하는 구조에서는 AI가 기존 문헌과 데이터베이스를 통합 분석한 뒤 가장 유망한 가설과 실험 조합을 제안하고, 로봇 실험실이 이를 자동 수행해 결과를 다시 모델에 반영하는 순환 체계를 구축한다. 마이클 크라치오스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장은 세계적 수준의 과학 데이터와 최첨단 AI의 결합이 의학, 에너지, 재료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낳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글로벌 경쟁 구도에서 보면 미국의 이번 행보는 국가 차원의 AI 인프라 통합 경쟁이 본격화된 흐름과 맞닿아 있다. 유럽연합이 유럽 고성능 컴퓨팅 공동체를 통해 슈퍼컴 인프라를 공유하고, 중국이 자체 슈퍼컴을 국가 AI 플랫폼과 연계해 전략 기술 개발에 투입하는 가운데, 미국도 연방 정부 차원의 폐쇄형 AI 기지를 공식화한 셈이다. 특히 유전체 분석과 신약 개발, 차세대 원자로 설계, 우주 탐사 임무 시뮬레이션 등은 대형 국가 프로젝트와 직결되는 만큼, 다른 나라와의 격차를 벌리기 위한 의도가 강하게 드러난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공공 데이터와 슈퍼컴퓨터를 AI 학습에 대거 투입하는 과정에서 규제와 법적 책임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백악관은 AI 규제 법안을 통과시키는 주 정부를 상대로 법무부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행정명령도 별도로 준비 중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연방 차원에서 AI 추진 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주 단위 규제 움직임을 제어하려는 시도로 읽히지만, 연방과 주 사이 권한 분쟁과 지역 정치권 반발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에너지 소비와 인프라 부담 역시 단기간에 현실적 리스크로 부상하고 있다. 초거대 AI 모델과 슈퍼컴 기반 시뮬레이션은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해 전력망 안정성과 요금 구조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일부 공화당 인사들은 AI 데이터센터와 슈퍼컴 가동이 전기요금을 끌어올려 유권자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며, 내년 중간선거를 앞둔 시점에 정치적 역풍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AI를 성장 동력으로 밀어붙이는 전략과 에너지 가격, 탄소 배출 관리 정책을 어떻게 조율할지가 향후 정책 논쟁의 핵심 변수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
미국 정부는 제네시스 미션을 통해 연구개발 속도와 효율을 극대화하고, 전략 산업 전반에서 초격차를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있다. 동시에 데이터 보호, 규제 권한, 에너지 비용 등 구조적 과제가 남아 있어, 초대형 AI 프로젝트의 성패가 기술 자체보다 제도 설계와 이해관계 조정 능력에 달렸다는 지적도 힘을 얻고 있다. 산업계는 이번 국가 프로젝트가 실제 상용 기술 확산과 시장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수 있을지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