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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강경진압 지휘자 재평가”…이재명, 박진경 대령 무공훈장 취소 검토 지시

윤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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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의 기억을 둘러싼 과거사 논쟁과 현 정부의 보훈·안보 기조가 맞부딪쳤다. 제주 4·3사건 당시 강경진압을 지휘한 고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지위와 무공훈장을 취소할지를 두고 정부와 정치권이 새로운 갈등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방부는 15일 박진경 대령에게 수여된 을지무공훈장 서훈 취소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 대령은 이 훈장을 근거로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으며, 이재명 대통령이 국가보훈부에 국가유공자 등록 취소 검토를 지시한 데 따라 훈장 자체를 다시 들여다보는 절차에 착수한 것이다.  

국방부는 이날 입장문에서 박 대령의 국가유공자 등록 취소 문제와 관련해 관련법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결정 내용을 함께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관련법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가능한 조치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박 대령 국가유공자 지정의 근거가 되는 무공수훈에 대한 재검토는 관계기관 협의와 관련 법령 검토가 필요한 사항"이라고 덧붙였다.  

 

국가보훈부는 법적 한계를 분명히 했다. 보훈부 관계자는 박 대령의 국가유공자 지정 경위를 설명하며 "박 대령의 국가유공자 지정은 을지무공훈장 수훈 사실을 근거로 이뤄졌기 때문에 보훈부가 임의로 취소할 수 없다"고 밝혔다. 다만 "무공훈장 서훈이 취소될 경우 국가유공자 지정도 소급해서 취소된다"고 말해, 국방부의 서훈 재검토 결과가 사실상 최종 변수임을 시사했다.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도 같은 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논란에 대한 인식을 드러냈다. 권 장관은 박 대령 국가유공자 지정 논쟁을 언급하며 "제주 4·3 희생자는 국가폭력의 희생자"라고 적었다. 그는 이어 "이념과 진영의 첨예한 현장에서 사실대로 판단하고 후속 조치를 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과거사 진상 규명 결과와 보훈 체계의 정합성을 맞추겠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상훈법에 따르면 서훈 추천권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드러나거나 중대한 하자가 있는 경우 서훈 취소를 요청할 수 있다. 무공훈장을 포함한 서훈 취소 여부는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결정된다. 특히 무공훈장의 경우 서훈 추천권자는 국방부로 규정돼 있어, 국방부 검토와 요청이 향후 국무회의 판단의 출발점이 된다.  

 

문제의 핵심에 선 박진경 대령은 1948년 제주에 주둔한 국방경비대 9연대장으로 부임해 강경 진압 작전을 지휘한 인물이다. 그는 5월 부임 이후 도민들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왔고, 4·3 관련 단체들로부터 양민 학살 책임자로 집중적인 비판을 받아왔다. 박 대령은 부임 한 달여 만인 1948년 6월 대령 진급 축하연 뒤 숙소에서 잠을 자던 중 부하들에 의해 암살됐다. 정부는 1950년 박 대령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무공훈장은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에서 전투에 참여해 뚜렷한 전공을 세운 이들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총 5개 등급으로 나뉘며, 을지무공훈장은 1등급인 태극무공훈장 다음으로 높은 등급이다. 군은 당시 박 대령이 수행한 작전을 공적으로 평가해 서훈을 추진했고, 이 훈장이 훗날 국가유공자 지정의 법적 근거로 연결됐다.  

 

박 대령 유족은 2025년 10월 을지무공훈장 수훈 사실을 토대로 국가유공자 지정을 신청했고, 서울보훈지청은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제주 4·3 관련 단체와 제주 지역사회는 곧바로 반발했다. 이들은 4·3사건 당시 학살 책임자로 지목돼 온 인물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한 것은 과거사 진상 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 기조에 역행한다고 주장하며 철회를 요구했다.  

 

여론이 커지자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보훈부에 박 대령의 국가유공자 등록 취소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지시 이후 국방부가 훈장 자체에 대한 재검토에 돌입하면서 문제는 단순한 개별 유공자 심사 차원을 넘어, 국가폭력 책임자의 보훈 적격성을 둘러싼 국가 차원의 재판단 국면으로 옮겨가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4·3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존중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군 작전 수행을 이유로 한 훈장을 뒤집는 것이 장병 사기와 군의 정통성에 미칠 파장을 우려하는 시각이 교차하고 있다. 4·3 희생자와 유족을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이미 4·3을 국가폭력으로 규정한 만큼, 그 책임자에 대한 국가적 예우는 재정비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군 출신 일부 인사들은 당대의 안보 상황과 지휘 체계를 무시한 단선적 평가라고 반발하는 분위기다. 이 같은 공방은 향후 다른 과거사 관련 군 지휘관·공무원에 대한 서훈과 국가유공자 지위를 재검토하는 전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파급력이 크다는 평가도 뒤따르고 있다.  

 

상훈법과 국가유공자법의 연계 구조상, 국방부가 박 대령의 무공훈장 서훈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취소를 요청하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서훈 취소 여부가 결정된다. 서훈이 취소될 경우 보훈부는 이를 근거로 국가유공자 결정을 소급해 정정하게 돼, 박 대령의 국가유공자 지위도 자동으로 박탈된다.  

 

국방부와 국가보훈부는 관계기관 협의와 법령 검토를 거쳐 조만간 구체적인 검토 결과를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이날 정부는 4·3 사건과 과거사 문제에 대한 후속 조치를 둘러싸고 여론과 정치권의 반응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향후 국무회의는 상훈법 절차에 따라 박 대령 서훈의 유지 여부를 심의할 예정이다.

윤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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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대통령#국방부#박진경대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