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가뭄·지진 징후 읽는다”…지질연, 광섬유 재난망로 대응
기후위기로 인한 지질 재해 패턴이 단일 사건을 넘어 연쇄적이고 대형화된 양상으로 바뀌고 있다. 집중호우에 이은 산사태, 장기 가뭄에 따른 상수원 고갈, 도심 싱크홀과 지진, 해저 케이블 사고 위험까지 도시와 인프라 전반에 걸쳐 복합 재난이 일상화되는 구조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통신용 광섬유를 센서로 전환하는 인공지능 기반 재난 안전망과 전국 지하수 데이터베이스를 앞세워, 국가 차원의 목적 지향형 재난 대응 기술을 구축하겠다는 전략을 공개했다. 업계와 학계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향후 지질 재해 예측과 대응 체계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끄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는 가평과 산청의 산사태, 강릉 가뭄, 도심 지반함몰, 경주 지진 등 서로 다른 유형의 재해가 짧은 기간에 겹쳐 발생했다. 유엔 통계에서도 2000년부터 2019년까지 전 세계 자연재해 발생 건수가 그 이전 20년 대비 약 두 배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면서, 기후와 지질, 도시 인프라가 얽힌 시스템 재난이 새로운 표준이 되는 흐름이 뚜렷해지는 양상이다. 산불 이후 극한호우로 인한 2차 피해, 물 부족과 지하수 고갈, 해저 전력케이블 손상 같은 새로운 유형의 위험도 복합적으로 증가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서울에서 연 심포지엄에서 윤병준 탄소저장연구센터장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대표 사례로 들며 재난의 연쇄화와 대형화가 본격화됐다고 진단했다. 지진으로 원전이 손상되고 화재와 구조물 붕괴를 거쳐 방사능 오염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태가, 고밀도 도시와 핵심 인프라가 밀집된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전형적 패턴이라는 분석이다. 윤 센터장은 최근 급증하는 극한 강수와 같은 기상이변이 재난의 일상화 흐름을 강화하고 있다며, 이를 관리하기 위해 전국 단위의 목적 지향형 재난 대응 기술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질연이 주목하는 핵심 축은 통신 인프라와 인공지능을 활용한 차세대 계측 기술이다. 탄소저장연구센터는 기존 점 센서 방식으로는 넓은 지역의 지하 구조와 미세한 변화를 실시간 감지하기 어렵고, 오탐지 비율도 높다는 한계를 지적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미 광케이블이 매설된 도로, 해저 전력케이블, 해상과 육상 풍력단지 등에서 통신용 광섬유를 재난 감시용 센서로 전환하는 분산 센싱 기술을 개발 중이다. 광섬유를 따라 전송되는 빛의 산란·위상 변화를 분석하면 진동, 변위, 온도 등 다양한 물리량을 연속적으로 측정할 수 있어, 지진 전조, 지반 침하, 케이블 손상 징후를 넓은 구간에서 동시에 포착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여기에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결합해 신호 패턴을 학습시키면, 자연 지진과 공사 진동, 차량 통행처럼 서로 다른 이벤트를 구분하고, 비정상 패턴을 조기에 경보하는 재난 진단 시스템을 구성할 수 있다. 지질연은 이러한 기술을 통해 전국에 깔려 있는 광케이블을 일종의 거대한 지질 재해 관측망으로 활용하면서, 재난 상황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디지털 트윈 기반 국가 안전 플랫폼 구축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물 부족과 지하수 고갈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수자원 측면의 데이터 인프라도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지하수환경연구센터는 전국 약 1만 지점에서 수집한 고밀도 지하수 데이터를 통합해 권역별 지하수 정보지도를 구축했다. 이 지도에는 수리 지질 구조, 수위 변동, 수질 특성, 충전·방출 특성 등이 포함돼, 가뭄 시기에 지하수 개발 유망지를 신속히 찾아낼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실제로 강릉 지역 가뭄 당시 해당 지도가 지하수 개발 후보지 자문에 활용돼 상수원 다변화와 식수난 완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질연은 지하수 정보를 국민과 지자체, 기업이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웹 기반 공공플랫폼 이지스를 개발할 계획이다. 이 플랫폼에서는 인공지능이 지하수 개발 유망지를 후보로 제시하고, 전문가 검증을 거쳐 개발 적합성, 예상 수량, 수질 리스크 등을 종합 평가한다. 사용자는 행정구역 단위나 유역 단위로 지하수 잠재력을 시각화해 볼 수 있고, 기후 시나리오에 따른 중장기 수량 변화 예측 결과도 참고할 수 있도록 설계될 전망이다. 이를 통해 지자체는 무분별한 관정 개발과 지반 침하 위험을 줄이면서, 안정적인 비상 용수 확보 전략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진 분야에서도 인공지능 기술 접목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송석구 지진연구센터장은 지진 관측망의 고도화와 더불어, 지진파 형태, 발생 위치, 시간 패턴을 동시에 분석하는 AI 모델의 역할이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지진 전조 현상 탐지와 복잡한 단층 구조 해석은 인간 연구자가 수동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영역이기 때문에, 대규모 관측 데이터에서 패턴을 스스로 찾아내는 딥러닝 기반 분석이 향후 핵심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국내는 상대적으로 강진 경험이 적어 학습 데이터가 제한적이라는 점이 약점으로 꼽히지만, 지진계 밀도와 실시간 데이터 품질 측면에서는 미국, 일본, 유럽과 견줄 만한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질연은 이 같은 인프라를 바탕으로 일본 국가연구소 등과 공동 연구를 확대하고, 미국 등 강진 경험이 많은 국가의 지진 기록을 활용해 시뮬레이션과 합성 데이터 생성 연구를 추진하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이를 통해 한반도 주변에서 발생 가능한 지진 시나리오를 다각도로 예측하고, 건물·인프라 설계 기준과 연계 가능한 위험지도를 정교화하겠다는 구상이다.
정부 차원에서도 복합 재난 위기 대응을 위한 국가안전관리 기본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제5차 기본 계획에는 과학적 예측 모델과 방대한 재난 데이터를 연계해 선제적으로 위험을 관리하고, 관련 기술의 글로벌 리더십을 확보하겠다는 방향이 담겼다. 통합 재난 데이터 플랫폼 구축, 위성·지상 복합 관측망, 인공지능 기반 경보 시스템 등이 주요 축으로 논의되고 있으며, 지질연의 지질 재해 기술을 포함해 각 부처와 연구기관의 성과를 연동하는 것이 관건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결국 재난 기술이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려면 데이터 표준화와 기관 간 연계, 법·제도 정비가 동반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센서 데이터의 수집·활용 범위와 개인정보 보호, 지하수 개발과 환경 보전의 균형, AI 경보 시스템의 책임 소재 등은 향후 정책 논의의 핵심 쟁점이 될 수 있다. 해외에서도 지진 조기경보·홍수 예측·산불 감시 등에 인공지능과 센서 네트워크가 결합된 사례가 늘고 있어, 한국이 독자 기술을 바탕으로 국제 협력과 공동 대응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분위기다.
권이균 한국지질자원연구원장은 현재의 지질 재해를 기후와 수문, 도시 환경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시스템 재난으로 규정하며, AI와 디지털 기반 연구 역량을 통합해 정부와 유관기관, 국제 기관과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산업계와 정책 당국은 이러한 과학 기술이 실제 재난 대응 체계 속에 얼마나 빠르게, 그리고 안전하게 흡수될 수 있을지 지켜보는 한편, 기술과 윤리, 산업과 제도의 균형이 새로운 재난 안전 패러다임의 성패를 가를 것으로 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