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사건 희생 양민 배상 특별법 제정하라"…유족들, 22대 국회에 마지막 호소
국가폭력의 진상 규명과 책임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다시 국회를 향했다. 1951년 거창사건 희생자 유족들이 배·보상 특별법 처리를 요구하며 22대 국회를 찾아 여야 지도부를 상대로 절박한 호소에 나섰다. 30년 가까이 이어진 입법 표류가 또다시 반복될지, 정치권의 결단 여부가 주목된다.
17일 경상남도 거창군에 따르면 거창사건희생자유족회와 산청군유족회는 최근 서울 여의도 국회를 방문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등 여야 지도부와 면담을 진행했다. 유족들은 계류 중인 거창사건 배·보상 특별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핵심 요구로 제시했다.

유족회 대표단은 국회에서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 추미애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신정훈 국회 행정안전위원장, 신성범 국회 정보위원장, 더불어민주당 민홍철 의원, 전현희 의원 등 여야 관계자들을 차례로 만나 법안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각 상임위원회 소속 핵심 인사들을 직접 설득해 입법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의도다.
이성열 거창사건희생자유족회 회장은 면담 자리에서 "거창사건은 다른 사건과 달리 순수한 양민이 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고령의 유족들이 새벽부터 상경해 호소하는 현실을 헤아려 이번 국회에서는 반드시 특별법을 통과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배상 문제를 더 미루기 어려운 고령화 현실을 정면으로 제기한 셈이다.
유족들을 만난 국회의원들은 희생자와 유족이 겪어온 긴 세월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뜻을 표했다. 한 의원은 "국가의 잘못이 명확한 배상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예산과 법률 검토, 사회적 공감대 형성 등 종합적인 고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관련 상임위원회에서 꼼꼼한 논의를 진행하겠다"고 밝혀, 재정 부담과 입법 쟁점을 둘러싼 신중론과 처리 의지 사이의 간극을 드러냈다.
거창사건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발생했다. 당시 국군이 공비 토벌을 명분으로 작전을 벌이던 과정에서 어린이와 부녀자가 대부분이던 신원면 주민 719명을 집단 학살한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국가 공권력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자행한 대표적인 전시 민간인 학살 사건이라는 점에서, 진상 규명과 배상 요구가 이어져 왔다.
1996년에는 거창사건 관련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돼 희생자 판정과 위령사업 추진의 근거가 마련됐다. 그러나 법률에 배·보상 규정이 빠지면서 유족들 사이에서는 "반쪽짜리 입법"이라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은 이뤄졌지만, 국가의 위법 행위에 대한 실질적 배상이 뒤따르지 않았다는 문제 제기다.
배상 문제를 다룬 입법 시도도 있었다. 2004년에는 배상금 지급 규정을 포함한 거창사건 관련 법률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으나, 당시 정부의 거부권 행사로 효력 발생 전 단계에서 무산됐다. 이후 17대 국회부터 22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거창사건 배·보상 특별법안은 반복적으로 발의됐지만, 회기 만료나 심사 지연으로 폐기되는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다.
현재 22대 국회에서는 거창사건 배·보상 특별법안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행정안전위원회는 사건의 성격과 피해 범위, 배상 기준 등을 다루고, 법제사법위원회는 법률 체계성과 재정 소요 등을 검토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처리 일정과 관련해 여야가 구체적인 합의에 이르렀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정치권에서는 다른 과거사 관련 입법과의 형평성 문제도 쟁점으로 떠오를 수 있다. 이미 여러 전시 민간인 학살 사건과 인권 침해 사건을 둘러싼 배상 입법이 진행된 만큼, 거창사건 배상 문제를 더 미루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는 반면, 개별 사건별 특별법이 재정 부담과 법체계 혼선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도 공존한다는 분석이다.
거창사건 유족들은 22대 국회가 사실상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 여야 지도부를 상대로 추가 접촉을 이어갈 계획이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가 구체적 심사 일정과 처리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지, 정치권이 국가 폭력 피해자 배상 문제에서 어떤 기준과 원칙을 제시할지가 향후 정국의 또 다른 과제가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