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가격 25퍼센트 오른다"…미영, 의약품 관세 면제로 갈등 봉합
미국과 영국의 의약품 정책과 무역 전략이 정면으로 맞물리며 글로벌 제약 산업의 가격 체계가 크게 흔들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영국산 의약품과 의료 기술에 예고했던 고율 관세를 철회하는 대신, 영국은 공공의료 시스템에서의 약가 구조를 손보며 신약 가격 인상을 받아들였다. 양국은 이 같은 합의를 통해 통상 갈등을 봉합하는 동시에 자국 내 제약 투자와 고용 확대를 노린 것으로 해석된다. 업계에서는 이번 결정이 의약품 접근성과 혁신 투자 간 균형을 두고 벌어진 규범 경쟁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에 따르면 양국은 1일 영국이 미국으로 수출하는 의약품과 의약품 원료, 의료 기술에 대한 관세를 전면 철폐하기로 합의했다. 당초 미국은 무역확장법 232조를 근거로 영국산 의약품에 최대 100퍼센트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경고했으나, 최종적으로 0퍼센트 관세로 선회했다. 동시에 영국의 공공 약가 정책을 무역법 301조 조사 대상에서 제외해 향후 통상 압박을 완화하기로 했다.

대신 영국은 국민보건서비스 체계에서의 가격 규제를 완화한다. 현재 영국은 NHS 지출 관리 차원에서 제약사가 의약품을 판매해 얻는 수익의 약 23퍼센트를 NHS에 환급하도록 하는 구조를 운용하고 있는데, 합의에 따라 이 환급률을 내년부터 최대 15퍼센트로 낮추기로 했다. 제약사가 부담해 온 환급 비율을 줄여주는 만큼, 실제로 정부와 병원이 지불하는 신약 순가격이 오르는 구조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신약 구매 정가를 25퍼센트 인상하기로 한 대목이다. 영국은 지난 10년간 신약 지출을 억제하며 공공 재정을 방어해 왔지만, 이번 합의로 약가 억제 기조가 후퇴하는 흐름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커졌다. NHS를 통해 치료제를 공급받는 환자 입장에서는 보험 재정과 약가 협상 구조에 따라 실질 부담이 달라질 수 있어, 단기적으로는 공공 재정 압박과 접근성 논쟁이 심화될 수 있다.
이번 합의의 배경에는 미국의 강도 높은 재협상 압박이 작용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영국 제약사가 미국 내 생산시설을 확대하지 않을 경우 영국에서 수출되는 의약품에 최고 100퍼센트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미국 내 직접 투자와 생산 확대를 무역 협상의 핵심 카드로 활용하며, 공급망과 고용을 동시에 끌어들이려는 계산이 반영된 셈이다.
영국 주요 제약기업도 발걸음을 맞추고 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향후 5년간 300억달러, 약 44조원 규모를 미국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제조 시설과 연구개발 거점을 미국으로 더 많이 옮기는 방향이 가시화될 경우, 영국 내 고급 제조 일자리와 연구 인프라 유출 우려도 커질 수 있다. 반대로 미국은 자국 내 생산기반을 강화해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고, 첨단 바이오 의약품에서 기술 우위를 공고히 하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USTR는 이번 합의가 양국이 추진하는 미 영 경제번영협정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EPD의 핵심 목표를 영국 의약 산업 환경의 개선과 미국과의 무역 불균형 완화로 제시하며, 약가 관행 조정과 관세 철폐가 상호 보완적인 패키지라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영국의 공공 약가 규제를 완화시켜 자국 제약사의 수익성을 개선하고, 그 대가로 무역장벽을 낮춰주는 구조다.
영국 정부는 이번 합의가 환자 접근성 측면에서 긍정적 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영국 측은 성명에서 두 나라 간 합의로 많은 환자에게 의약품 접근과 공급망이 안정적으로 보장되고, 새로운 치료법이 임상 현장에 더 빨리 도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약사가 얻는 수익성이 개선되면 신약을 영국 시장에 우선 출시할 유인이 커져, 혁신 치료제 도입 시차를 줄일 수 있다는 논리다.
다만 공공의료 모델을 유지해 온 영국에서 약가 인상이 사회적 논쟁으로 번질 소지도 크다. NHS는 예산 한도 내에서 비용 효과성이 검증된 치료제를 우선 도입하는 구조를 유지해 왔고, 환급 제도는 제약사와 정부 간 리스크를 나누는 장치로 기능해 왔다. 환급 비율 인하와 가격 인상은 제약사에 유리한 조건으로 기울 수 있어, 향후 약가 재협상 과정에서 시민단체와 의료계의 반발이 예고된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글로벌 제약 시장에서도 파장은 불가피하다. 미국이 관세를 지렛대로 각국의 공공 약가 정책을 직접 조정하려는 시도를 보인 만큼, 다른 국가와의 자유무역협정이나 양자 협상에서도 유사한 요구가 이어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특히 공공보험 비중이 큰 유럽 국가들은 약가 인상 압박과 재정 지속 가능성 사이에서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야 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신약 개발 투자와 공공 보장성 강화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새로운 가격결정 모델 논의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산업계에서는 무역정책과 의약품 가격 규제가 한 축으로 결합하는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관세와 약가, 투자와 고용이 하나의 패키지로 묶이는 구조가 확산할 경우, 제약사는 R D 전략뿐 아니라 생산기지와 시장 진입 순서를 재설계할 필요가 커진다. 동시에 환자와 정부는 혁신 치료제 접근성과 재정 부담 간 균형점을 다시 설정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산업계는 이번 미 영 합의가 실제로 환자의 치료 접근성을 높이면서도 각국 보건 재정과 제약사의 혁신 투자를 동시에 지지하는 방향으로 안착할 수 있을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