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공과채 국제규격 설계”…한국, K푸드 수출 규범 주도
김치와 고추장, 인삼제품 같은 한국 전통 발효식품의 국제 규범을 한국이 직접 설계하는 국면이 열리고 있다. 전 세계 식품 교역의 기준이 되는 국제식품규격이 한국의 손을 거쳐 개편될 경우, 그동안 개별 수입국 규제에 막혔던 한국 식품 기업들의 수출 전략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이번 조치를 K푸드 수출 규범 경쟁의 분기점으로 바라보며, 향후 가공 농식품 수출 구조 전반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본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지난 11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제48차 국제식품규격위원회 총회에서 우리나라가 가공과채류분과위원회 의장국으로 공식 선출됐다. 이에 따라 한국은 내년부터 이 분과위원회를 주재하며 김치·고추장·인삼제품·식혜·곶감 등 가공 과일·채소 기반 한국 전통식품과 관련한 국제 식품규격 제정과 개정 논의를 이끌게 된다. 의장국은 회의 안건 상정, 초안 마련, 회원국 의견 조율 등 규격 도출 과정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 실질적인 규범 설계자로 평가된다.

국제식품규격위원회 CODEX는 세계식량농업기구와 세계보건기구가 공동 운영하는 식품 규범 기구로, 각국 정부와 기업은 CODEX 규격을 수출입 점검의 주요 기준으로 활용하고 있다. 가공과채류분과위원회는 통조림, 절임, 건조 과일과 채소류, 혼합 가공품 등 글로벌 유통량이 많은 품목을 폭넓게 다루는 핵심 분과에 속한다. 김치와 고추장처럼 발효·양념 공정을 거치는 제품의 품질 규격, 첨가물 허용 기준, 잔류 농약 기준과 같은 세부 기술 규격도 이 분과에서 다뤄질 수 있다.
특히 이번 의장국 지위는 한국 전통식품의 공정 특성을 국제 표준 설계 단계에서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예를 들어 김치의 경우 젖산균 발효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산도와 미생물 특성이 품질과 안전성 논의에 함께 반영돼야 하지만, 지금까지는 비발효 가공채소 기준을 적용해 안전 기준이 과도하거나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의장국 역할을 통해 발효식품 특유의 공정과 품질 특성을 설명하고,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별도 기준을 설계할 여지가 커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고추장과 인삼제품, 식혜, 곶감 등도 마찬가지다. 당 함량, 수분 활성도, 저장 중 품질 변화와 같은 항목에 대해 시료 분석 데이터를 제시하며 과학적으로 안전성이 입증될 경우, 지나치게 보수적인 보존료 기준이나 불필요한 추가 검사 요구가 조정될 수 있다. 특히 당류와 나트륨 저감, 표시 의무 등 건강 이슈와 연결된 조항에서 한국이 제안하는 기준이 국제 규격에 반영되면, 국내 기업은 기존 생산 공정을 크게 바꾸지 않고도 주요 수출국 규제 요건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 식품업계는 K푸드 수출 전략 측면에서 이번 의장국 선출에 주목하고 있다. CODEX 규격이 세계무역기구 분쟁 조정의 기준으로 활용되는 만큼, 한국식 김치나 고추장 표준이 국제 규범으로 고착되면, 다른 국가가 유사 제품을 다른 이름으로 판매하거나, 한국산 제품에만 별도 규제를 적용하는 상황을 줄이는 효과가 기대된다. 실제로 일부 국가는 자국 소비자 기호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발효취 등을 문제 삼거나, 유산균 수 변화에 따른 품질 변수를 근거로 추가 검사를 요구해 왔다. 국제 표준이 정교해지면, 이런 비관세 장벽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글로벌 식품 시장에서는 이미 가공 과일·채소류 기준을 둘러싼 규범 경쟁이 본격화된 상황이다. 유럽연합은 자체 규정을 통해 첨가물 허용 기준을 세밀하게 관리하고 있고, 미국은 자국 식품안전현대화법을 바탕으로 수입 식품의 예방관리 의무를 강화해 왔다. 이 과정에서 발효와 양념 중심의 동아시아식 가공식품은 서구권 기준과 맞지 않는 항목이 적지 않았다. 한국이 의장국으로서 논의를 이끌면, 아시아 발효식품의 특성을 반영한 균형 잡힌 기준을 제안할 수 있어 지역 식품 기업 전체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규제 측면에서는 국제 규격과 국내 법령 간 정합성 문제도 주목된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이미 김치, 장류, 인삼가공품 등에 대해 제조 기준과 성분 규격, 표시 요건을 세부적으로 정하고 있다. 앞으로 CODEX 기준과 국내 기준을 최대한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제도를 조정할 경우, 기업 입장에서는 하나의 생산 규격으로 국내외 시장을 동시에 공략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수출 대상국의 별도 요구사항과 충돌할 여지가 남아 있어, 각국 규제기관과의 협의 과정도 병행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의장국 수임을 계기로 한국이 식품 안전과 품질 관리 역량을 글로벌 기준으로 재정의할 수 있다고 본다. 국내 연구기관과 대학들이 축적해온 발효 과학, 나트륨 저감 기술, 기능성 성분 분석 데이터 등을 CODEX 논의 테이블에 제시하면, 규격 설계 과정에서 과학적 근거를 주도적으로 제공하는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평가다. 동시에 소비자 건강 보호라는 국제 규범의 원칙을 충실히 반영해야 하는 만큼, 전통식품이라고 해서 예외를 요구하기보다는 과학적 검증을 전제로 한 기준 완화를 추구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가공과채류분과위원회 의장국 선정을 계기로 국내 업계와의 소통 채널을 넓혀, 국제 규격 제정 단계부터 기업 의견을 수렴한다는 방침이다. 실제 상용 제품의 제조 조건, 보관 유통 환경, 소비 패턴 등을 데이터로 정리해 CODEX 회의에 제출하면 규격 논의에 현실성이 더해질 수 있다. 중소 식품기업에게는 해외 규제 정보를 보다 빠르게 공유하고, 수출 인증 준비 과정을 단계적으로 지원하는 정책 연계도 검토될 것으로 보인다.
산업계는 앞으로 몇 년간 이어질 CODEX 규격 개정 논의에서 한국이 어느 수준까지 영향력을 확보할지 주시하고 있다. 국제 규범 설계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더라도, 최종 결정은 회원국 합의로 이뤄지는 만큼, 외교력과 과학 데이터, 산업 이해관계 조율이 모두 관건이 될 전망이다. 기술과 규격, 수출 전략이 맞물린 이번 규범 경쟁 구도에서 K푸드가 어떤 위상을 확보할지에 따라, 국내 식품산업의 성장 경로도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결국 글로벌 식품 규범과 국내 산업 구조 조정이 함께 이뤄질 때, 한국 전통식품의 확장된 역할이 구체화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