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넘어 퀀텀까지…정부, 국가전략기술 서밋서 차세대 성장동력 구상
인공지능을 넘어 양자컴퓨팅과 차세대 반도체까지 포괄하는 국가전략기술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정부와 산학연이 한자리에 모여 기술패권 경쟁의 방향 전환을 모색하며, AI 3대 강국 도약과 함께 공급망 재편, 딥테크 역량 강화 전략을 동시에 꺼내들었다. 단기 성과 위주의 추격형 전략에서 벗어나, 도전적 연구개발과 장기 자본 결합을 전제로 한 설계형 국가 전환이 향후 성장동력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1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국가전략기술 서밋을 개최했다. 행사에는 산학연 전문가와 정책 관계자 등 약 1000명이 참석해 AI를 포함한 주요 국가전략기술의 청사진을 공유했다. 정부는 이번 자리를 NEXT 전략기술을 축으로 한 과학기술 강국 도약 비전 선포의 장으로 규정하고, 향후 10년을 겨냥한 기술·산업 로드맵 설계에 방점을 찍었다.

행사는 산학연관 합동 비전인 NEXT 전략기술로 과학기술강국 대도약 선언으로 시작됐다. 이어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정통부 장관의 기조연설과 대학, 산업계, 금융권, 연구계 대표의 릴레이 발표가 이어졌다. 각 발표는 AI, 반도체, 에너지, 양자, 소재 등 개별 기술을 넘어 이들을 엮는 국가 차원의 전략 설계를 전제로 했다.
배경훈 부총리는 기조연설에서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이 AI에서 과학기술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세계적인 경기 둔화와 잠재성장률 하락이 구조적 위기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이를 반등시킬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은 기술혁신뿐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AI 3대 강국 진입을 목표로 내세운 한국이 기술주권을 갖추려면 초거대 AI, 차세대 반도체, 에너지 전환, 양자 정보과학을 한 축으로 엮는 통합 전략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이어진 산학연 릴레이 발표에서는 기존 개별기술 중심의 추격형 전략을 넘어서는 구조 혁신이 핵심 화두로 떠올랐다. 유홍림 서울대 총장은 복합 위기가 상시화된 시대에는 외부 기술을 빠르게 따라잡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가가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미래 방향을 설계하는 설계형 국가로 전환해야 한다며,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 질문기반혁신을 제안했다. 서울대는 국내외 학계와 산업계,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집단지성과 함께 거대질문 플랫폼을 구축해 전략기술 의제를 발굴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정수헌 LG사이언스파크 대표는 초거대 AI 국가에 걸맞은 민관협업 모델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는 AI, 반도체, 통신, 모빌리티, 디스플레이 등 LG 그룹이 보유한 기술 포트폴리오를 예로 들며, 민관산학이 통합설계와 공동투자, 공동기술확산 구조로 묶여야 산업 전환 속도를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자율주행, 위성통신, 첨단 패키징과 같은 분야에서 실증 데이터를 확보하려면 단일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 인프라와 인재양성 체계가 필요하다며, 국가 차원의 공동 인프라 구축을 촉구했다.
기술과 자본의 연결 구조도 과제로 떠올랐다. 박상진 한국산업은행 회장은 국가전략기술 경쟁력 확보를 위해 금융이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분담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밝혔다. 반도체, 차세대 배터리, 소형모듈원자로와 같은 분야는 대규모 자본을 장기간 투입해야 해 민간 투자만으로는 공백이 생기기 쉽다. 그는 산업은행이 마중물 자본으로서 초기 단계 딥테크 기업에 대한 지분·채권 투자, 정책금융과 민간 펀드를 연계한 혼합금융 구조를 확대하겠다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회수 기간이 길고 불확실성이 높은 전략기술 영역으로 민간 자금이 유입될 여지를 넓히겠다는 구상이다.
학계에서는 하이테크와 딥테크의 선순환 구조 설계가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왔다. 김성근 포항공과대학교 총장은 글로벌 시장이 형성된 하이테크 영역과 아직 시장이 발현되지 않은 딥테크를 구분해 접근할 것을 주문했다. 한국이 강점을 가진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 하이테크 산업을 지렛대로 활용해 기초·원천기술을 키우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성장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평가다. 그는 연구개발 주체 간 역할 분담, 박사급 인재의 과감한 재교육, 모험형 투자, 전략국가와의 기술동맹을 딥테크 역량 강화를 위한 핵심 요소로 꼽았다.
2부에서는 세 개의 세션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기술·산업 전략 논의가 진행됐다. 첫 번째 세션에서는 AI 3대 강국 진입을 위한 국가전략기술 혁신 방안이 집중 논의됐다. 참석자들은 한국이 강점을 지닌 제조, 통신, 콘텐츠 산업에 AI 에이전트와 피지컬 AI를 결합해 산업 전환, 이른바 산업 AX를 가속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공장 자동화와 물류, 에너지 관리, 스마트시티 인프라에 자율 의사결정 기능을 갖춘 AI를 적용하면 생산성과 에너지 효율을 동시에 높일 수 있다는 분석이 뒤따랐다.
AI 인재 생태계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전문가들은 초거대 AI 모델 개발과 응용 서비스 고도화를 동시에 추진하려면 AI 친화적 인재양성이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학의 컴퓨터공학, 수학, 통계, 뇌과학, 바이오를 잇는 융합 교육과 기업 수요에 맞춘 실전형 커리큘럼, 글로벌 공동 연구 경험 확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일부 참석자는 AI 연구 인력이 학계와 산업계를 넘나드는 순환 구조가 자리 잡을 경우, 모델 개발뿐 아니라 알고리즘 효율화, AI 반도체, AI 보안까지 생태계 전반이 강화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신약 개발 분야에서의 AI 활용도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논의에 참가한 제약·바이오 전문가들은 AI가 후보물질 탐색, 합성 가능성 예측, 독성·부작용 시뮬레이션에 이미 도입되고 있다며, 한국이 보유한 임상 데이터와 병원 네트워크를 결합하면 AI 기반 신약 개발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여지도 크다고 평가했다. 다만 AI 바이오 혁신을 위해서는 의료 데이터 활용 규제, 알고리즘 검증 절차, 식약처 품목허가 기준과 같은 제도적 요소를 정교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두 번째 세션에서는 공급망 재편 시대의 기술자립과 협력 방향이 논의됐다. 참석자들은 미중 기술 갈등과 지정학 리스크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반도체 컴퓨팅 성능, 에너지 수급, 전략물자 확보가 동시에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를 넘기 위해 한계돌파형 중장기 R&D에 대한 집중 투자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예를 들어 2나노 이하 공정에서의 GAA 트랜지스터, 3D 패키징 기술, 고대역폭메모리와 같은 첨단 반도체 기술을 국내에서 실증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는 제언이다.
전력망과 에너지 인프라는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산업의 병목으로 지목됐다. 초대형 데이터센터와 팹 증설이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전력 수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AI와 반도체 산업 모두 확장에 제약을 받게 된다. 참석자들은 재생에너지 확대, 차세대 원전, 고효율 전력망 기술을 아우르는 중장기 에너지 전략을 기술정책과 연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유럽이 반도체법, 인플레이션감축법 등을 통해 반도체와 에너지 투자를 패키지로 묶는 흐름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공급망 관련 토론에서는 한국의 기술 자립 위험요인 분석도 제시됐다. 첨단 노광장비, 특수가스, 핵심 소재 등 일부 전략 품목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여전히 높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는 핵심 장비와 소재의 국산화, 동맹국과의 공동 구매, 기술제휴를 통한 리스크 분산 방안이 거론됐다. 동시에 모든 분야를 독자 기술로 가져가기보다는, 한국이 강점을 가진 영역을 중심으로 다층적 협력망을 설계해야 한다는 현실론도 제기됐다.
세 번째 세션에서는 미래 산업을 이끌 차세대 국가전략기술 선점 전략이 다뤄졌다. 양자컴퓨팅과 양자소재, 차세대 배터리, AI 기반 소재 탐색 등 경제·안보적 가치가 큰 영역이 주된 논의 대상이었다. 전문가들은 양자 정보과학이 암호, 센서, 고성능 컴퓨팅에서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다며, 실용화까지는 시간이 걸리지만 지금부터 인력과 인프라를 선제적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자칩 설계, 극저온 시스템, 양자 오류 정정과 같은 세부 기술도 국가 차원의 로드맵에 포함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뒤따랐다.
AI와 과학기술의 융합도 주목받았다. 참가자들은 퀀텀 AI와 AI 기반 소재 탐색을 예로 들며, 기존 실험·시뮬레이션 중심 연구방식에 AI를 접목해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탐색 범위를 넓히는 방향이 확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재 분야에서는 배터리 수명과 안전성을 좌우하는 전극·전해질 조합을 AI가 제안하고, 연구자가 이를 검증하는 형태의 협업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융합 연구가 자리를 잡을 경우, 기존보다 2배 이상 빠른 속도로 유망 소재 후보군을 추려낼 수 있다는 전망도 제시됐다.
토론자들은 국가가 기술개발을 통해 해결해야 할 임무를 보다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기후위기, 에너지 전환, 고령화, 사이버 안보와 같은 초국경 과제를 중심으로 선제 확보할 기술 목록을 정리하고, 여기에 예산·인력·규제를 통합 설계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단일 사업 중심 지원에서 탈피해, 전략기술별로 기초연구, 응용연구, 실증, 상용화를 하나의 패키지로 보는 접근도 요구됐다.
행사장에는 국가전략기술을 개발 중인 국내 기업들의 기술 전시도 마련됐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소형모듈원자로 기술을, 포스코홀딩스는 이차전지 소재와 관련 솔루션을 공개했다. LG사이언스파크, LG전자, LG이노텍 등은 위성통신, 반도체 첨단패키징, 첨단 모빌리티 분야에서 진행 중인 R&D 성과를 선보이며, 산업 현장에서 구현 중인 국가전략기술 로드맵을 공유했다.
행사에 참여한 산학연 전문가들은 한국이 가진 폭넓은 기술·산업 포트폴리오와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할 때, 연구계·산업계의 빠른 대응과 정부의 제도적 토대가 결합된다면 전략기술 확보는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과제라고 평가했다. 다만 주요국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K-전략기술 협력 모델을 마련하고, 혁신 기술이 연구실을 넘어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될 수 있도록 규제와 금융, 인재정책을 동시에 손봐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산업계는 이번 서밋을 계기로 수립될 국가전략기술 로드맵이 실제 시장과 글로벌 협력 구조 속에서 어떤 성과로 이어질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