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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성고객 응대도 리스크”…배달노동, 플랫폼 안전망 부실

이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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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 플랫폼을 매개로 한 비대면 서비스가 일상 인프라가 된 가운데, 현장에서 고객과 직접 맞닿는 배달노동자의 안전은 여전히 기술·제도적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공기관 직원의 폭언 사례가 공개되며, 플랫폼 기업과 공공기관이 디지털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업계에서는 배달앱 구조가 거래 효율성을 높인 대신 민원과 분쟁 부담을 개인 기사에게 전가하는 방식이 고착되고 있다고 본다.

 

25일 한 종합 시사 프로그램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산하 지역 본부로 음식을 배달한 6년 차 배달기사 A씨의 제보가 소개됐다. 제보에 따르면 사건은 24일 오전 11시경 발생했다. A씨는 배달앱 주문 요청란에 적힌 대로 6층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고, 현장에 설치된 택배·배달음료 표지판과 인접한 테이블을 확인한 뒤, 표기된 구역에 음식을 내려놓고 인증 사진을 남겼다. 비대면 배달 구조에 따라 앱 내 사진 촬영과 업로드는 사실상 배송 완료를 증명하는 디지털 영수증 역할을 한다.

문제는 두 시간 뒤 배달 플랫폼을 통해 걸려온 항의 전화에서 불거졌다. 자신을 공단 직원이라고 밝힌 여성은 음식이 다른 주문과 달리 테이블이 아닌 바닥에 놓여 있었다고 주장하며 사과를 요구했다. A씨가 표지판 위치와 앱 요청사항을 근거로 설명했지만, 통화 상대는 해명을 수용하지 않았고, 눈이 안 보이냐는 말을 시작으로 가정교육을 못 받았냐, 장애 비하 표현까지 사용하며 인격 모독성 발언을 이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이번 사례는 플랫폼 구조상 고객 불만이 곧바로 개별 기사에게 전달되는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다. A씨는 배달앱 측에 악성 고객 문제를 알렸지만, 기사 보호를 위한 별도 대응 체계나 상담 창구는 사실상 작동하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현재 주요 배달앱들은 고객 평가와 리뷰 시스템을 정교화하면서도, 기사 입장에서 고객의 폭언이나 차별을 신고하고 재발을 막을 수 있는 실질적 제재 장치나 알고리즘 반영 기준은 충분히 공개하지 않고 있다.

 

공공기관의 내부 관리 체계도 도마 위에 올랐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측은 해당 본부 직원 수가 많아 발언자를 특정하기 어렵다며, 직원 대상 교육 강화를 언급하는 수준에서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디지털 플랫폼을 경유한 서비스 이용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공단과 같은 공공기관이 민원 응대 과정에서 외부 플랫폼 노동자를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조차 마련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내부 통화 기록 분석, 익명 민원 처리 기준, 대외 서비스 종사자 보호 규정을 포함한 조직 차원의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해외에서는 플랫폼 노동자 보호를 위한 기술·정책 결합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일부 배달 플랫폼은 앱 내 욕설 탐지 기능, 반복 악성 민원 제기 고객에 대한 자동 경고, 기사 평가 알고리즘에서 특정 고객의 비정상 패턴을 걸러내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또 일정 건수 이상의 신고가 접수된 고객 계정을 제한하거나, 노동자 정신건강 지원 프로그램과 연계해 AI 기반 상담 챗봇을 제공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반면 국내에서는 고객 평가 점수가 기사 수입과 직결되면서도, 고객 측 행태를 통제하는 기술적 안전장치와 제재 기준은 상대적으로 약한 편으로 평가된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플랫폼 산업이 성장 단계에서 서비스 품질 경쟁에 치중한 나머지, 노동자 안전과 감정노동 보호를 후순위로 둔 구조가 고착화됐다고 본다. 특히 공공기관까지 플랫폼 기반 서비스를 활용하는 상황에서, 단순한 고객 만족 지표가 아니라 플랫폼 상호작용 전 과정에서의 인권·노동 기준을 반영하는 지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배달앱 고객 이용약관에 혐오 표현과 차별 발언 금지 조항을 명시하고, 위반 시 계정 제한이나 서비스 이용 중단 등 실효성 있는 제재를 연동하는 방식도 거론된다.

 

디지털 전환이 공공과 민간 서비스 전반으로 확산하면서, 플랫폼에 연결된 노동자들은 사실상 새로운 형태의 IT 기반 필수 인프라를 떠받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폭언과 차별을 포함한 악성 고객 리스크는 개인이 감당해야 할 비용으로 남아 있다. 산업계와 공공 부문이 디지털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는 규칙과 기술적 장치를 어떤 방식으로 도입할지에 따라, 플랫폼 경제의 지속 가능성이 좌우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산업계는 이번 사례를 계기로 디지털 노동 환경이 실제로 개선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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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기사#국민건강보험공단#플랫폼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