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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정보 지키는 안심주소 검토…배송 데이터 보호 분수령

허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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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운송장에 실제 거주지를 그대로 노출하는 관행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본격 거론되고 있다. 정부가 전화번호를 가상 번호로 치환해 노출을 최소화한 안심번호 개념을 주소 체계에 확장하는 안심주소 도입 검토 의사를 밝히면서다. 반복되는 대형 유출 사고 속에 개인정보를 최소한만 드러내는 데이터 비식별화 기술이 물류망 전반으로 확산할지 주목된다. 업계에서는 안심주소 도입 여부가 유통과 전자상거래 분야의 보안 경쟁 구도를 바꾸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17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쿠팡 침해사고 관련 청문회에서 안심주소 도입 필요성에 대한 질의에 검토 대상으로 보인다고 답했다. 실제 주소 대신 가상 주소를 운송장에 표기해 택배 배송 과정에서의 직접 노출을 줄이자는 제안에 대해 정부가 제도화 가능성을 열어둔 셈이다.

현재 안심번호 서비스는 중고 거래나 주차 연락, 배달 주문 등 일상 영역에서 실제 번호 대신 050으로 시작하는 임시 번호를 제공해 통화와 문자를 중계한다. 통신망 상에서 가상 번호와 실제 번호를 매칭하되 상대방에게는 실번호를 감추는 방식이다. 정부가 검토하는 안심주소는 이 구조를 물류와 지리 정보 시스템에 접목하는 개념으로, 주소 정보가 유출됐을 때 피해 규모를 줄이고 재식별 위험을 낮추는 기술적 보호조치로 평가된다.

 

안심주소 논의의 직접적인 배경에는 최근 쿠팡에서 발생한 개인정보 침해 사고가 자리한다. 고객 이름, 이메일, 전화번호뿐 아니라 배송지 주소까지 대량 유출되면서, 전자상거래 사업자의 개인정보 처리 구조에 대한 제도적 보완 필요성이 다시 부각됐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청문회에서 국내 대형 유통기업 대부분이 유사한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지적하며, 우정사업본부를 보유한 과기정통부가 선도적으로 배송 체계와 주소 관리 방식을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술적 구현을 위한 사전 연구도 이미 일부 진행된 상태다. 한국국토정보공사는 2020년 이용자에게 고유명사 형태의 안심주소를 부여하고 배송에 관여하는 최소 인원만 실제 주소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연구 과제를 발주했다. 과제 설계에 따르면 개인의 지번과 도로명으로 구성된 주소는 행복한, 우리, 집처럼 의미를 갖는 단어 조합의 가상 주소로 변환돼 블록체인에 저장된다. 이 가상 주소는 국토정보공사의 주소정보 데이터베이스와 연동돼, 필요 시 양방향 매칭이 가능한 구조다.

 

택배 거래 단계에서는 가상 주소 문자열과 해당 정보를 담은 바코드만 박스에 부착한다. 물류 시스템은 이 바코드를 스캔해 내부 시스템에서만 실제 주소를 조회하고, 권한이 있는 관계자나 최종 배송 담당자에 한해 원주소를 확인하도록 설계된다. 분류 센터, 하청 기사, 제3의 협력사 등 다수의 참여자가 운송장을 거치더라도 실제 주소 노출 빈도가 크게 줄어드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블록체인 기반 저장 구조를 활용하면 위변조 방지와 접근 기록 추적이 용이해져 개인정보 처리 이력 관리와 감사에도 유리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준석 대표는 배송 마지막 단계에서만 실제 주소를 기술적으로 노출하는 체계가 연구된 만큼, 이를 제도와 인프라에 접목하는 것이 개인정보 보호 강화의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안심번호가 통신 분야에서 자리 잡았듯, 안심주소도 충분히 시행 가능한 수준이라고 보면서 우정사업본부가 시범 도입을 통해 민간 물류업계의 참여를 촉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배 부총리는 이 같은 제안에 정책적 검토가 필요한 사안으로 판단한다고 밝혀, 후속 연구와 시범사업 추진 가능성을 열어뒀다.

 

물류 플랫폼의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주소 정보는 방대한 데이터셋의 핵심 요소가 됐다. 고객 행동 분석, 배송 최적화, 추천 알고리즘 등 다양한 서비스 고도화 과정에서 주소 데이터는 다른 식별자와 결합해 개인을 상세하게 재구성할 위험을 안고 있다. 안심주소처럼 주소를 가상화해 처리하면 데이터 분석에는 필요한 위치 정보와 패턴만 활용하고, 실제 거주지 노출은 제한하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특히 스마트폰 앱을 통한 실시간 배송 추적과 출입 인증 시스템이 결합되는 환경에서, 미니멀 데이터 원칙에 부합하는 주소 체계 전환은 정책적 우선 과제로 부상하는 분위기다.

 

해외에서도 주소 체계와 개인정보 보호를 결합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글로벌 전자상거래 기업들은 자체 코드 기반 배송지 식별자, 건물 단위 토큰화, 임시 배송지 토큰 발급 등으로 실제 주소 노출을 최소화하는 방식을 검토 중이다. 다만 국가별 우편번호 시스템과 법정 주소 체계가 다르고, 규제 당국의 데이터 보존 의무가 상이해 통일된 표준은 아직 부재하다. 국내에서 안심주소가 제도화될 경우, 블록체인 연계형 가상 주소라는 점에서 다른 국가의 단순 코드 치환 방식보다 높은 수준의 추적성과 위변조 방지 기능을 갖춘 사례로 주목받을 여지도 있다.

 

안심주소 도입을 위해서는 기술 구현과 별개로 법제와 규제 정비가 병행돼야 한다. 개인정보보호법상 주소는 명백한 개인정보에 해당하며, 가상 주소와 원주소 간 매핑 정보 역시 재식별 가능성이 있는 민감 데이터로 취급된다. 택배사, 플랫폼사, 공공기관이 이 정보를 공동 활용하는 과정에서 개인정보 처리자 범위, 위탁과 공동사용의 경계, 접근 통제 수준을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 또한 택배 사고 조사, 분쟁 해결, 범죄 수사 등 특수 상황에서 어느 기관이 어떤 절차로 원주소를 복원하고 열람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세부 규정도 마련이 필요하다.

 

산업계 입장에서는 안심주소 도입이 추가적인 IT 인프라 투자와 시스템 개편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동시에 대규모 유출 사고에 따른 법적 책임과 신뢰도 하락 리스크를 줄이는 보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건별 주소 접촉 주체를 최소화하고 접근 로그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면, 유출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 규명과 피해 범위 한정이 상대적으로 용이해질 것으로 보인다. 개인정보 보호를 중시하는 소비자 요구가 커지는 만큼, 안심주소를 선제적으로 도입한 유통·물류 기업이 브랜드 신뢰도 측면에서 우위를 점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전문가들은 안심주소 도입 논의가 개인정보 최소 수집과 비식별화라는 글로벌 데이터 거버넌스 흐름과 맞닿아 있다고 보고 있다. 단순한 주소 치환을 넘어, 공공기관과 민간 플랫폼이 공유 가능한 보안 인프라로 발전할 경우 디지털 헬스케어, 스마트시티, 위치 기반 서비스 등 다른 영역에도 확장 적용될 여지도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비용 부담과 표준화, 법제 정비 속도 차이로 인해 단계적 시범 사업과 분야별 선택적 도입이 먼저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산업계는 안심주소가 실제 물류 현장과 플랫폼 서비스에 무리 없이 안착할 수 있을지, 제도 설계와 기술 구현 방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허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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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주소#배경훈#쿠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