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관세 충격과 AI신약개발…K제약바이오 전략 분수령
불안정한 미국 통상 환경과 인공지능 기반 신약개발이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의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의 무역확장법 232조를 둘러싼 관세 정책 변화가 수출 구조를 뒤흔드는 가운데, 국내 업계는 공공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해 글로벌 R&D 허브로 도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동시에 AI가 실험 설계부터 후보물질 합성까지 자동으로 수행하는 자율실험실 개념이 부상하면서, 신약 파이프라인의 개발 속도와 경쟁 구도가 크게 재편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업계는 통상 리스크 관리와 디지털 전환 전략이 향후 생존을 가를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24일 서울 본회 4층 대강당에서 2025 KPBMA 커뮤니케이션 포럼을 열고 통상 환경 변화와 AI 신약개발 전략을 집중 논의했다. 행사에는 회원사 홍보 담당자와 제약바이오 산업 담당 기자들이 참석해 산업 현안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네트워크를 강화했다.

첫 발표에서 김혁중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트럼프 2기 정책 변화와 한미 관세 협상이 제약바이오 산업에 미칠 영향을 분석했다. 그는 제약바이오 관세 정책의 세부 윤곽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관세율이 현실적인 수준으로 조정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이 지난 4월 개시한 무역확장법 232조 검토 일정에 따라 늦으면 내년 4월 말 무렵 제약바이오 제품에도 새로운 관세율이 부과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놨다.
김 부연구위원은 대부분의 국가가 232조 관세로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지만, 협상을 통해 관세 폭을 줄이는 나라에는 일정 부분 방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시나리오 분석 결과를 토대로 한국이 미국과 협상을 통해 약 18억 달러, 약 2조6512억 원 수준의 경제적 손실을 줄일 여지가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제약바이오 분야에 관세 25퍼센트만 적용돼도 수익성과 공급망에 괴멸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25퍼센트에서 250퍼센트까지 다양한 관세율을 언급해 온 점을 언급하면서도, 김 부연구위원은 50퍼센트 이상의 고율 관세가 실제로 현실화될 가능성은 낮게 봤다. 그럼에도 원료의약품과 완제의약품, 바이오의약품을 포함한 전 밸류체인에 관세 부담이 더해질 경우 수출 경쟁력 저하와 생산기지 이전 압박이 가중될 수 있다고 풀이된다.
그는 동시에 미국 정책 변화가 한국에 새로운 기회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짚었다. 최근 미국에서 과학기술 분야 공공 R&D 예산 삭감 움직임이 나타나는 점을 들어, 한국이 오히려 공공 제약 R&D 투자를 공격적으로 늘려 글로벌 R&D 허브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창이 열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공공 연구 인프라와 임상 네트워크를 확충해 다국적사와 공동연구를 유치하고, 관세와 무역 규제를 넘어서는 기술 기반 파트너십을 확대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두 번째 세션에서는 AI와 자동화 기술이 접목된 신약개발 패러다임 전환이 논의됐다. 표준희 한국제약바이오협회 AI신약연구원 원장은 AI 신약개발 자율화 시스템을 소개하며, 이미 AI 기술 도입에 적극 투자한 기업들은 전체 신약 파이프라인 개발 기간을 2년에서 최대 3년까지 줄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후보물질 탐색, 독성 예측, 약물 재창출 같은 전통적으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던 단계에 AI를 적용해 실험 횟수와 실패율을 줄이고 있다는 것이다.
표 원장은 최근 신약개발 자율화 시스템이 하나의 거대 AI 모델이 아닌, 역할이 분화된 여러 AI 에이전트의 집합체로 진화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각 에이전트는 표적 단백질 구조 예측, 분자 설계, 합성 경로 탐색, 독성 예측 등 특정 작업에 특화돼 상호 협업하는 구조로, 가상 공간에 하나의 연구소와 유사한 운영 환경을 구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실제 연구 인력과 랩 공간, 장비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면서도 병렬 실험과 시뮬레이션을 대폭 늘릴 수 있는 방식으로 평가된다.
핵심 개념으로 제시된 AI 기반 자율실험실 SDL은 AI와 로봇이 실험 전 과정을 스스로 수행하는 지능형 연구 시스템이다. 데이터 기반으로 AI가 최적 실험 조건을 도출하고 실험계획을 세우면, 로봇이 설계된 프로토콜에 따라 신약 후보물질을 합성하고 샘플을 준비한다. 이후 자동화 분석 시스템이 반응 결과와 생물학적 활성을 측정해 데이터로 축적하면, AI가 이를 다시 학습해 다음 실험 디자인을 개선하는 순환 구조다. 사람이 설계와 실행, 분석을 순차적으로 진행하던 기존 방식과 비교하면 실험 회전율과 탐색 공간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같은 자율실험실이 확산되면 후보물질 발굴과 최적화 단계에서 국가 간 격차가 벌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일부 제약사와 바이오텍이 AI와 로봇을 결합한 고도 자동화 연구 플랫폼을 구축해, 소규모 인원으로 대규모 화합물 라이브러리를 빠르게 스크리닝하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아직 대형 제약사와 일부 AI 스타트업 중심으로 파일럿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수준으로, 인프라 투자와 인력 재교육이 병행돼야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표 원장은 앞으로 AI 자율실험실이 여러 기업과 기관에 폭넓게 구축돼 상호 협업이 이뤄질 경우, 신약개발 데이터와 모델 성능이 상호 강화되는 선순환이 가능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데이터 품질과 표준, 알고리즘 검증, 규제 당국의 평가 기준이 정교하게 마련돼야 실제 임상과 허가 단계에서 병목이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미국 관세 리스크와 AI 기반 연구 인프라 구축이 동시에 제약바이오 산업의 전략 과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정부와 민간이 통상 대응과 기술 투자를 병행하는 이중 전략을 요구하고 있다. 공공 R&D 허브 육성과 AI 자율실험실 생태계 조성이 맞물릴 경우, 한국이 통상 불확실성을 기술 경쟁력으로 상쇄할 여지도 있다. 산업계는 새로운 환경에서 이번 논의가 실제 정책과 투자로 이어질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