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로 별이 밀려온다”…겨울밤 걷기축제 된 해운대의 야간 산책길
요즘 부산 겨울바다를 찾는 사람들 손에는 두꺼운 패딩 대신 카메라와 삼각대가 들려 있다. 예전엔 여름 피서지로만 기억되던 해운대가, 이제는 빛을 따라 걷는 겨울밤 산책지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찬 공기 속을 천천히 걸으며 파도 소리와 조명을 함께 즐기는 일이, 부산 겨울 여행의 새로운 일상이 됐다.
부산광역시 해운대구가 2025년 11월 29일부터 2026년 1월 18일까지 여는 제12회 해운대 빛축제는 이런 변화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해운대 해수욕장과 구남로 일대가 축제 기간마다 거대한 빛의 동선으로 변하면서, 계절성이 강했던 해운대가 사계절 관광 거점으로 몸을 바꾸는 중이다. 낮에는 파도와 백사장이, 밤에는 별빛과 조형물이 같은 장소를 전혀 다른 얼굴로 보여준다.

이번 축제의 주제는 ‘STELLAR HAEUNDAE 별의 물결이 밀려오다’다. 그 이름처럼 해운대 해수욕장과 도심을 잇는 길 위로 별과 파도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이어진다. 백사장에는 파도 위로 떠오르는 별빛이 층층이 깔리고, 산책로에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은하수와 도심을 가로지르는 별의 물결이 관람객의 발걸음을 부드럽게 이끈다. 걷다 보면 어느새 바다와 도시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긴 은하수 터널 안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 스며든다.
점등은 매일 18시부터 23시까지 이어진다. 해가 완전히 지고 첫 조명이 켜지는 순간, 해운대의 풍경은 낮과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뒤바뀐다. 모래사장 위에는 색과 형태가 다른 구조물이 깊이감을 만들며 야경을 설계하고, 구남로 거리의 가로수와 가로등은 조명 장식을 더해 산책과 쇼핑, 사진 촬영이 어우러지는 밤 산책 코스로 변신한다. 그 길을 따라 연인과 가족, 친구들이 각자의 속도로 천천히 걸으며 하루를 정리한다.
빛 조형물만으로도 충분히 화려하지만, 해운대 빛축제의 경험을 풍성하게 채우는 건 미디어아트다. 일부 구간에서는 음악과 조명, 영상이 결합된 연출이 상영된다. 관람객이 움직일 때마다 반응하는 빛, 파도 소리에 맞춰 색이 변하는 조명, 건물 외벽과 공공 공간을 캔버스로 삼은 프로젝션이 해운대의 밤을 또 하나의 전시 공간으로 만든다.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꺼내 들게 되는 순간들이 이어지고, 그 장면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산된다.
축제의 시작을 여는 점등식은 11월 29일 저녁,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진행된다. 해가 완전히 내려앉는 18시, 김재희의 오프닝 공연이 해안가에 음악의 온기를 채우고, 이어지는 환영 인사와 축하 메시지가 도시의 겨울밤에 축제의 호흡을 더해준다. 불이 켜지는 퍼포먼스와 함께 사람들의 시선과 탄성이 한 곳에 모인다.
이날 19시가 되면 해운대의 밤하늘은 또 한 번 표정을 바꾼다. 바다 위에서 터져 오르는 불꽃이 조명으로 물든 해변과 겹쳐지면서 하나의 커다란 파노라마를 만든다. 물결 위에 비친 불꽃의 궤적은 잠시 말문을 닫게 만들고, 조용히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대비를 이루며 해운대 특유의 정취를 드러낸다. 이어지는 디셈버 DK의 축하 공연은 음악으로 점등식의 여운을 길게 끌어준다.
축제를 걷는 재미는 참여의 순간에서 완성된다. 해운대 빛축제는 단순히 ‘보고 지나가는’ 행사라기보다, 머물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경험을 지향한다. 매일 18시부터 22시까지 운영되는 체험존에서는 포토존 촬영, 가족·연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각종 놀이와 이벤트가 준비된다. 세대와 국적에 상관없이 누구나 어색하지 않게 참여할 수 있는 구성이어서, 언어보다 먼저 빛과 웃음이 사람들을 연결해 준다.
이런 변화는 숫자보다 표정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축제 기간이면 해운대 해수욕장과 구남로에는 국내 여행객뿐 아니라 해외 관광객의 발길도 이어진다. 바다와 조명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랜드스케이프는 다른 도시에서 쉽게 찾기 어려운 장면이다. 그래서 요즘 부산 여행 일정표에는 ‘해운대 빛축제 산책’이 자연스럽게 필수 코스로 적힌다. 낮의 바다는 파도 소리를, 밤의 해운대는 빛을 기념품처럼 남긴다.
해운대 주민들에게도 이 시간은 익숙한 동네를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직장인들은 퇴근 후 가벼운 겉옷만 걸치고 해변 산책을 나서고, 아이 손을 잡은 부모들은 모래사장 위를 밝히는 조형물 앞에서 한참을 머문다. 데이트 코스, 가족 나들이, 혼자 걷는 사색의 길이 한 공간에 겹쳐지는 풍경이다. 각자가 다른 이유로 찾지만, 돌아갈 때 주머니에 담아 가는 건 비슷한 종류의 위로다.
전문가들은 이런 야간 축제를 도시의 ‘삶의 리듬’을 바꾸는 장치로 본다. 낮에 일과 소비가 집중된 도시는 퇴근 이후 곧장 어두워지곤 했다. 그러나 해운대 빛축제 같은 야간 문화 프로그램은 저녁 이후의 도시를 산책과 교류, 여유의 시간으로 채운다. 조명이 켜진 백사장과 거리는 단순한 관광 명소를 넘어, 지역 주민과 여행객이 함께 어울리는 공용 거실 같은 공간이 된다.
현장을 찾은 사람들의 반응도 비슷한 결을 공유한다. “춥지만 이상하게 오래 걷고 싶어진다”, “사진 찍으러 왔다가 그냥 멍하니 파도만 보고 있었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SNS에는 형형색색 조형물 사진만큼이나, 어두운 바다 위로 흐릿하게 번지는 빛과 그 앞에서 잠시 멈춰 선 사람들의 뒷모습이 자주 올라온다. 화려함과 고요함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빛으로 물든 해운대의 겨울밤은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싶은 이들에게 짧지만 충분한 쉼표를 건넨다. 바다를 따라 이어진 빛의 길을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현실의 소음은 조금씩 멀어지고 손끝과 눈에 남는 건 부드러운 파도 소리와 은은한 조명뿐이다. 크지 않은 산책이지만, 마음의 온도는 그 안에서 조금씩 조정된다. 해운대 빛축제를 따라 걷는 이 계절의 발걸음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가 어떤 밤을 원하고 있는지 조용히 보여주는 풍경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