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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특별재판부·법왜곡죄 위헌성 크다"…전국 법원장회의, 민주당 사법개혁 법안에 집단 우려

이예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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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개혁을 둘러싼 정치적 충돌 속에서 전국 법원장들이 더불어민주당 주도의 내란전담특별재판부 설치와 법왜곡죄 신설 법안에 대해 위헌성이 크다며 집단으로 우려를 제기했다.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앞둔 상황에서 사법부 수뇌부가 직접 목소리를 낸 것이어서 향후 정국에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대법관)과 각급 법원장들은 5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대회의실에서 전국법원장회의 정기회의를 열고 약 6시간에 걸쳐 관련 현안을 논의한 뒤 이 같은 입장을 내놨다. 회의에는 법원행정처장과 각급 법원장, 사법연수원장, 사법정책연구원장, 법원도서관장 등 대법원 소속기관 최고위 법관 43명이 참석했다.

전국법원장회의는 대법원을 제외한 각급 법원의 법원장과 사법행정 수뇌부가 모이는 공식 회의로, 매년 12월 정기회의를 통해 사법행정 전반의 점검과 현안 논의를 진행해 왔다. 그러나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과 법왜곡죄 도입 법안을 단독 처리한 뒤 사법개혁을 둘러싼 논쟁이 거세지자, 법원행정처는 당초 준비했던 의제들을 서면보고로 대체하고 관련 법안 논의를 중심 안건으로 전환했다.

 

법원장들은 회의 후 발표한 입장문에서 먼저 지난해 이른바 12·3 비상계엄 사태를 "위헌적 12·3 비상계엄"으로 규정했다. 이들은 "위헌적 12·3 비상계엄이 국민과 국회의 적극적 노력으로 해제됨으로써 헌정질서가 회복된 데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한다"며 "비상계엄 관련 재판의 중요성과 국민의 지대한 관심·우려를 엄중히 인식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사법개혁 법안에 대해서는 강도 높은 우려를 덧붙였다. 법원장들은 "신설 법안이 재판의 중립성과 국민의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고, 종국적으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본질적으로 침해해 위헌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어 "향후 법안의 위헌성으로 인해 재판 지연 등 많은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논의의 직접 대상이 된 내란전담재판부 설치 법안은 12·3 비상계엄과 관련해 윤석열 전 대통령, 한덕수 전 국무총리 등 연루 인사에 대한 내란 사건을 전담하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법왜곡죄 법안은 재판이나 수사 중인 사건에서 법관이나 검사가 고의로 법리를 왜곡하거나 사실을 조작하는 경우 형사처벌을 가능하게 하는 규정이다. 두 법안 모두 지난 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통과됐다.

 

법원장들은 구체적인 사건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과 한덕수 전 국무총리 등과 관련된 내란 사건 1심 선고를 앞둔 상황을 의식하며 국민에게 이해를 구했다. 이들은 "관련 사건의 선고가 예정된 상황이므로, 국민들께서는 사법부를 믿고 최종적인 재판 결과를 지켜봐 주기를 부탁드린다"고 요청했다. 이어 "각급 법원은 재판의 신속하고 집중적인 처리를 위한 모든 사법·행정적 지원을 다할 것임을 국민께 약속드린다"고 덧붙였다.

 

법원장들은 또 최근 서울고등법원이 내란, 김건희, 순직해병 등 3대 특별검사 사건의 항소심에 대비해 '집중심리 재판부'를 운영하겠다고 밝힌 점을 언급했다. 이들은 해당 계획이 비상계엄 관련 사건의 신속하고 효율적인 심리를 위한 장치임을 상기하면서, 국회가 추진 중인 특별재판부 설치와 법왜곡죄 신설이 오히려 재판지연과 절차 무력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 셈이다.

 

조희대 대법원장도 이날 회의에 앞서 인사말을 통해 사법개혁 법안들에 대한 우려를 분명히 했다. 조 대법원장은 "사법제도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중대한 기능을 수행하는 만큼, 한 번 바뀌면 그 영향이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오랜 세월 지속된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그릇된 방향으로 개편된다면, 그 결과는 국민에게 직접적이며 되돌리기 어려운 피해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조 대법원장은 "그러므로 사법제도 개편은 충분한 논의와 공론화 과정을 거친 뒤 이론과 실무를 갖춘 전문가의 판단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또 "최근 사법부를 향한 국민의 기대와 요구는 그 어느 때보다 크고 무겁다"며 "이럴 때일수록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을 통한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라는 헌법이 우리에게 부여한 사명을 묵묵히 수행해 내는 것만이,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다시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전국법원장회의는 통상 사법보좌관 인사제도 개편, 법관윤리 제고를 위한 감사 강화, 예산 집행의 전문화 등 사법행정 과제를 점검하는 장으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대법원은 지난 9월에도 전국 법원장 임시회의를 열어 더불어민주당의 사법개혁 추진과 관련한 논의를 진행한 바 있다. 당시에도 법원장들은 "제도 개편 논의에 사법부 참여가 필수적"이라는 공식 입장을 내며 국회를 향해 신중한 접근을 요구했다.

 

사법부 수뇌부의 연이은 공개 입장은 국회에서 진행 중인 사법개혁 입법 공방과 맞물려 정치권 논란을 더욱 키울 전망이다. 여당과 야당은 내란전담재판부 설치와 법왜곡죄 도입을 두고 각각 사법정상화와 사법장악 시도라는 상반된 프레임을 내세우며 이미 격렬하게 맞서고 있다. 법원장회의가 위헌성을 정면으로 거론함에 따라 향후 국회 본회의 처리 과정과 헌법재판소 판단 여부가 정국의 새 변수로 부상할 가능성이 커졌다.

 

국회는 정기국회와 이후 임시국회 일정에서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과 법왜곡죄 도입 법안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의를 이어갈 전망이다. 사법부는 관련 법안 심사 과정에 전문 의견을 제시하는 한편, 계엄 관련 재판과 특별검사 사건 재판을 예정대로 진행한다는 방침이어서 정치권과 사법부의 힘겨루기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예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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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법원장회의#내란전담재판부#법왜곡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