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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한 바퀴, 강변 한 바퀴”…광양에서 보내는 느리지만 꽉 찬 하루

김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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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를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다. 유명 관광지보다 일상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동네, 화려한 맛집 대신 사람 냄새 나는 시장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사소한 풍경이지만, 그 안에서 잠시 쉬어 가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다.

 

요즘 전남 광양을 찾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런 흐름이 눈에 띈다. 섬진강과 남해가 맞닿는 이 도시는 그만큼 자연이 넉넉하지만, 여행객들은 풍경만 보고 떠나지 않는다. 아침에는 빵집에서 하루를 열고, 낮에는 강변을 산책하고, 해가 기울면 오일장을 구경하는 식으로 광양의 생활 리듬을 그대로 따라가 보려 한다.

먼저 하루를 여는 곳으로 입소문이 난 곳은 마동의 뉴욕제과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따뜻한 빵 냄새가 먼저 반긴다. 진열대에는 정성스럽게 구워낸 수제 빵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손님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둘러보며 고른다. 커피 한 잔을 곁들여 창가에 앉으면, 도시의 분주함과는 다른 속도로 시간이 흐르는 느낌이 들곤 한다. 어떤 여행자는 “관광지에서 먹는 특별한 음식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사랑하는 빵집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게 더 근사하게 느껴졌다”고 표현했다.

 

이런 움직임은 숫자로도 읽힌다. 지역 여행 트렌드를 다루는 통계에선 소도시 베이커리, 로컬 카페를 중심으로 한 ‘생활형 여행’ 코스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화려한 볼거리보다 익숙한 풍경 속에서 새로운 일상을 체험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반영된 결과다.

 

뉴욕제과에서의 달콤한 여유를 뒤로하고 향할 만한 곳은 태인동의 배알도수변공원이다. 이곳은 섬진강이 남해와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해, 강과 바다가 한눈에 담기는 풍경을 선물한다. 시원한 강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물빛이 시간마다 조금씩 다른 표정을 짓는다. 연인들은 난간에 기대 사진을 남기고, 가족 단위 여행객들은 강 건너 풍경을 배경으로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연신 셔터를 누른다. “바다까지 가지 않아도 충분히 탁 트인 기분을 느꼈다”는 후기가 괜히 반복되는 말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수변 공간을 찾는 흐름을 ‘일상 회복형 여행’이라 부른다. 멀리 떠나기보다 가볍게 걸으며 눈앞의 풍경에 집중하는 시간 자체가 심리적 회복에 큰 도움이 된다고 본다. 한 도시계획 전문가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은 사람들에게 경계가 풀리는 감각을 선사한다”며 “그곳에서 쉬는 경험이 마음의 긴장을 낮추는 데 효과적이라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고 전했다.

 

해가 기울 무렵, 광양의 또 다른 얼굴을 보고 싶다면 광양읍 목성리의 광양5일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겨볼 만하다. 매월 1, 6, 11, 16, 21, 26일 열리는 이 오일장은 장날마다 도시 분위기를 바꾸는 힘을 지녔다. 시장 입구를 지나면 뜨끈한 국밥 냄새가 먼저 코를 자극하고, 한쪽에선 팥죽이 보글보글 끓는다. 갓 튀겨낸 꽈배기는 종이봉투 안에서 김을 내고, 만두와 커피를 파는 가게 앞에는 자연스럽게 줄이 생긴다.

 

상인들의 목소리도 이곳의 풍경을 채운다. 손님에게 한 줌 더 얹어주며 “멀리서 왔으면 더 챙겨줘야 한다”고 웃음을 건네는 주인장, 맛을 먼저 보라며 수줍게 시식을 내미는 가게. 그렇게 장터를 한 바퀴 돌다 보면, 여행자는 어느새 관광객이 아니라 ‘오늘 장 보러 온 사람’처럼 느끼게 된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광양5일시장 후기를 공유한 글에는 “괜히 시장 한 바퀴 돌면 그 동네가 조금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 든다”, “화려하진 않은데 또 가고 싶다”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광양에서의 하루를 조금 더 길게 붙들고 싶다면, 봉강면 지곡리의 호수도도글램핑장에서 밤을 보내는 선택도 늘고 있다. 광양 백운 저수지를 내려다보는 산 정상에 자리한 이곳은 시내와 멀지 않아 부담 없이 찾아가기 좋다. 잘 정돈된 시설 덕분에 번거로운 준비 없이도 캠핑 감성을 누릴 수 있고, 온수 시설이 갖춰진 화장실이 있다는 점도 여행자들에게 안도감을 준다.

 

석식으로 제공되는 BBQ와 아침 도시락이나 버거는 “장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풍성한 캠핑이 가능했다”는 반응을 얻고 있다. 일부 사이트에서는 사계절 내내 반려동물 동반이 가능해, 반려견과 함께 호수를 바라보며 불멍을 즐기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불멍 패키지, 보드게임, 대형 빔 프로젝터까지 더해지면서 아이를 동반한 가족, 편안한 주말을 찾는 커플 모두에게 밤이 짧게 느껴지는 공간이 되고 있다. 실제로 머물러 본 이들은 “호텔보다 별빛이 더 많은 숙소였다”고 농담처럼 고백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이런 글램핑 수요를, 번거로움은 줄이고 자연과 가까이 있고 싶어하는 현대인의 욕구가 만든 타협점으로 본다. 캠핑 장비를 사고 챙길 여유는 없지만, 텐트 안에서 불빛을 바라보며 느긋해지고 싶은 마음은 그만큼 커졌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여행지 선택의 기준도 ‘볼거리’에서 ‘쉼의 방식’으로 옮겨가고 있다.

 

광양 여행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도 비슷하게 남는다. 누군가는 뉴욕제과에서 사 온 빵을 들고 배알도수변공원 벤치에 앉아 강을 바라본 아침을 떠올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장날 시장에서 먹은 한 그릇 국밥의 온기를 먼저 이야기한다. 호수도도글램핑장에서 밤하늘을 보며 나눴던 대화가 가장 인상 깊었다는 이들도 있다. 화려한 이벤트가 아니라, 조용한 풍경과 소박한 한 끼가 여행의 핵심 장면으로 남는 셈이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각자 다르지만, 광양에서의 하루는 대체로 비슷한 여운을 남긴다. 재빨리 소비하고 잊어버리는 관광이 아니라, 천천히 걷고 맛보고 바라보는 사이에 마음의 속도도 조금씩 늦춰진다. 시장 한 바퀴, 강변 한 바퀴, 호숫가에서의 한밤을 지나고 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진다.

 

작고 사소한 선택처럼 보이는 여행지의 동선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광양에서 보낸 이 느린 하루가, 앞으로의 일상을 대하는 태도에도 작은 쉼표를 남겨줄지 모른다.

김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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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광양5일시장#배알도수변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