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바이오

빅파마 특허만료 비용 295조 전망…AI로 신약론칭 승부수

정하린 기자
입력

글로벌 제약사의 특허 만료 파고가 한층 거세지고 있다. 헬스케어 시장조사기관 아이큐비아는 향후 5년간 대형 제약사의 독점권 상실 비용이 2배 이상 늘어나 2030년까지 2000억달러, 약 295조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기존 블록버스터 의약품의 특허 장벽이 무너지는 속도가 빨라지는 가운데, 비만치료제 열풍과 보험급여 문턱 강화, 보건의료 인력 부족까지 겹치며 신약 론칭 전략의 전면 재설계가 불가피해졌다는 분석이다. 업계에서는 AI 기반 임상·마케팅 최적화 기술이 이른바 특허절벽 경쟁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아이큐비아가 발표한 2030년을 향한 의약품 론칭의 새로운 패러다임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주요 제약기업의 독점권 상실 비용은 2018년부터 2023년까지 810억달러에서 2023년부터 2028년까지 1920억달러로 2.4배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정 신약에 부여된 특허가 만료되면 제네릭과 바이오시밀러가 시장에 진입해 가격이 떨어지고, 기존 오리지널 제품의 독점 이익이 빠르게 감소하는 구조다. 보고서는 대형 제약사들이 성장과 수익성 측면에서 강한 압박을 받고 있으며, 최근 인력 감축 발표 역시 이런 구조적 부담의 연장선에 있다고 해석했다.

특히 주요 빅파마들은 특허만료 공백을 메우기 위해 후기 임상 파이프라인을 유례없이 공격적으로 확장하는 중이다. 매출 상위 15개 제약사는 평균 53개에 달하는 후기 단계 임상 프로그램을 가동 중인 것으로 집계됐다. MSD는 면역항암제 키트루다의 특허 만료를 앞두고 후속 적응증 확대와 병용요법, 차세대 면역항암제 개발을 포함해 약 90개의 후기 임상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후기 임상은 대규모 환자를 대상으로 효능과 안전성을 최종 검증하는 단계로, 성공 시 단기간에 대형 매출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특허절벽을 메우는 핵심 수단으로 꼽힌다.

 

이 과정에서 AI와 디지털 기술은 파이프라인 운영 효율을 높이는 도구로 부상하고 있다. 환자 등록 속도 예측, 임상시험 설계 시뮬레이션, 실사용데이터 기반 효능 분석 등에서 AI를 적용하면 임상 성공 확률을 기존 대비 높이고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평가다. 예를 들어 특정 바이오마커를 가진 환자군을 사전에 정교하게 선별하면 임상 실패 위험을 낮추고, 적합 환자 수가 제한적인 희귀질환 영역에서도 시험 속도를 앞당길 수 있다. 보고서는 대형 제약사가 블록버스터 제품의 가치를 임상 3상 단계부터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AI 기반 통찰 확보에 더욱 의존하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시장 환경은 신약 론칭에 한층 불리해지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보고서는 최근 비만치료제 급부상으로 소비자 중심 헬스케어가 가속화되고 있으며, 그만큼 환자·소비자 경험을 전제로 한 제품 포지셔닝과 데이터 기반 서비스 설계가 중요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동시에 유럽에서는 신약의 46퍼센트만이 급여 승인을 받는 등 시장접근성이 악화되는 흐름이 뚜렷하다. 각국 보건당국이 재정 부담을 이유로 급여 등재 기준을 강화하면서, 혁신성을 입증하지 못한 신약은 허가 후에도 실제 매출로 이어지지 못할 위험이 커졌다.

 

보건의료 인력 부족도 중요한 변수다. 보고서는 글로벌 차원에서 약 1100만명의 보건의료 인력이 부족해질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했다. 현장 진료 인력이 줄어들면 새로운 치료제에 대한 교육과 처방 확산이 지연될 수 있고, 디지털 헬스케어 도입 속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지난 5년간 127개의 추가 신약이 시장에 나와 경쟁 강도가 이미 최고 수준으로 높아진 상황에서, 의료진의 정보 수용 여력이 제한되면 신약 간 격차가 초기 단계에서 더 크게 벌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아이큐비아는 론칭 후 첫 6개월을 신약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 구간으로 지목했다. 분석 결과 초기 6개월 동안 부진했던 제품 가운데 이후 시장 궤도를 성공적으로 수정한 사례는 13퍼센트에 그친 반면, 80퍼센트 이상은 초기 성과 패턴이 장기 매출 추세로 그대로 이어졌다. 블록버스터 잠재력이 있는 신약일수록 허가 직후 인지도 형성과 처방 패턴 구축, 급여 협상 등을 얼마나 빠르게 진행하느냐가 매출 곡선을 좌우한다는 설명이다. 이는 허가 이후가 아니라 허가 전 단계에서부터 데이터를 축적하고 이해관계자와의 접점을 넓혀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가별 시장 특성도 뚜렷해 론칭 전략의 정교한 현지화가 요구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은 제품 출시 후 18개월 매출의 68퍼센트를 첫 6개월에 달성하는 반면, 중국과 영국은 같은 기간 비중이 각각 23퍼센트, 29퍼센트에 머문다. 독일처럼 초기 채택 속도가 빠른 시장에서는 허가 직후 공격적인 마케팅과 급여 등재 전략이 중요하지만, 중국과 영국처럼 장기 관성 시장에서는 보험제도 변화, 지역 의료체계 구조 등 중장기 변수에 맞춘 접근이 필요하다는 해석이 나온다.

 

아이큐비아는 향후 성공적인 신약 론칭의 기준으로 헬스케어 시스템과의 파트너십 역량을 꼽았다. 단순히 약을 공급하는 수준을 넘어 진료 경로를 혁신하고, 입원과 시술 부담을 줄일 수 있는 투약 방식과 제형을 설계하며, 국가 차원의 질병 관리 이니셔티브에 참여하는 모델이 핵심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예를 들어 주사제 대신 경구제나 지연 방출형 제형을 개발해 병원 내 체류 시간을 줄이거나, 만성질환 관리 프로그램과 연계해 환자 모니터링을 자동화하는 식이다. 이런 접근은 건강보험 재정 절감과 진료 효율 개선에 기여하는 만큼 급여 협상에서도 긍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AI와 디지털 기술 활용은 론칭 전략 전반에서 필수 도구로 제시됐다. 보고서는 빠른 인사이트 확보, 개인화된 콘텐츠 생성, 의료진과 환자 대상 타깃팅 정교화 등에서 AI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일부 글로벌 제약사는 실시간 처방 데이터를 분석해 특정 지역과 진료과의 처방 변화 신호를 포착하고, AI 기반 고객관계관리 시스템을 통해 의료진별 맞춤형 정보와 자료를 제공하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적절한 규제 준수를 전제로 환자 데이터와 처방 패턴을 분석하면, 기존 대비 더 세밀한 시장 세분화와 메시지 최적화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AI 활용이 확대될수록 환자 데이터 보호와 알고리즘 투명성에 대한 규제 논의도 강화될 전망이다. 유럽의 AI 관련 규제와 각국 개인정보 보호 법제가 제약사의 데이터 활용 범위를 제한할 수 있고, 알고리즘 편향이 특정 환자군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을 우려도 제기된다. 업계에서는 AI를 활용한 마케팅과 임상 최적화가 장기적으로 규제 당국의 가이드라인과 윤리 기준에 맞춰 조정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아이큐비아는 보고서를 통해 특허 만료와 시장 접근성 악화, 경쟁 심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환경에서는 프리 론칭 단계에서의 준비와 투자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했다. 파이프라인 관리, 시장 형성 활동, 헬스케어 시스템 파트너십, AI 기반 데이터 활용을 선제적으로 결합한 기업이 특허절벽 이후에도 성장 궤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산업계는 이러한 전략 전환이 실제 시장에서 성과로 이어질지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기술과 제도, 의료 현장이 맞물리는 속도가 향후 제약 산업 재편의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하린 기자
share-band
밴드
URL복사
#아이큐비아#빅파마#ms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