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청정전력 찾는 미중 한국, 핵융합 실증 로드맵 재편
인공지능 기반 서비스와 데이터센터 증설로 전 세계 전력 수요가 가팔라지는 가운데, 핵융합 에너지가 차세대 청정 전력원이자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핵심 전선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핵융합은 더 이상 장기 과제인 ‘미래 에너지’에 머무르지 않고, AI 인프라와 데이터 경제를 떠받치는 국가 전략 기술로 자리 이동 중이라는 평가다. 업계와 연구계에서는 AI를 기반으로 한 플라즈마 제어 기술이 상용화의 병목을 푸는 계기가 될 수 있는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권재민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 핵융합디지털연구본부장은 19일 서울 중구 과학기술자문회의실에서 열린 제22차 국가핵융합위원회에서 이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그는 AI 확산이 몰고 온 에너지 구조 변화를 짚으며 핵융합 실증 일정을 재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 본부장은 AI 시대에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전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2030년대에는 AI 데이터센터가 전 세계 전력 수요의 10%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이를 감당할 청정 에너지원 확보가 각국 최대 전략 과제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권 본부장은 핵융합이 주목받는 핵심 이유로 AI와의 상호 보완성을 들었다. 핵융합 에너지는 AI 인프라에 필요한 대규모 전력을 탄소 배출 없이 공급할 수 있는 한편, 반대로 AI가 핵융합 장치의 실증과 상용화를 앞당길 수 있는 기술적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핵융합이 더 이상 기초 과학기술 연구 대상에 머물지 않고, 상용 에너지원 확보를 목표로 한 패러다임 전환 단계에 들어섰다고 진단했다.
핵융합 상용화의 핵심 난제는 여전히 플라즈마 제어다. 태양 내부와 유사한 초고온 플라즈마를 지구상의 장치 내부에서 유지하고 안정적으로 제어해야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물리 현상은 단순한 이론 모델로 설명하기 어렵다. 기존에는 슈퍼컴퓨터를 활용한 정밀 수치해석에 의존해 왔지만 계산 부담이 크고 시간도 오래 걸려 실시간 제어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같은 제어 난제가 상용화 일정을 지연시켜 온 구조적 원인이었다.
최근 상황을 바꾸고 있는 요소로는 AI와 디지털 기술의 결합이 지목된다. 권 본부장은 AI와 디지털 기술을 통해 초고성능 플라즈마의 안정적인 AI 자율 운전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핵융합 장치를 디지털 트윈으로 구현한 뒤, 방대한 실험 데이터를 기반으로 AI가 최적 운전 경로를 탐색하고 실시간으로 제어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기존 물리 모델 기반 제어가 가진 속도와 정확도의 한계를 넘고 장치 운전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AI 기반 디지털 트윈 기술이 본격 도입되면 장치 소형화 전략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플라즈마 거동을 가상 환경에서 충분히 학습한 뒤 실제 장치 설계에 반영하면, 대형 실험로를 반복적으로 증설하지 않고도 주요 운전 조건을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 본부장은 이 같은 기술 구도가 정착될 경우 핵융합 에너지의 조기 실증이 가능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글로벌 기술 기업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구글 딥마인드가 커먼웰스퓨전시스템즈와 협력해 공공이 축적한 핵융합 데이터를 활용한 자율 운전용 AI 모델을 개발 중이다. 막대한 실험 데이터로 플라즈마 불안정성을 예측하고 제어 신호를 자동으로 도출하는 알고리즘을 시도하는 것이다. 엔비디아는 제너럴아토믹스가 보유한 핵융합 데이터를 활용해 AI 기반 핵융합 디지털 트윈을 구축하고 있다. 반도체와 GPU 인프라 강점을 앞세워 핵융합 시뮬레이션의 고도화와 상용 플랫폼화를 동시에 노리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권 본부장은 핵융합 데이터를 둘러싼 AI 기업들의 관심이 기술 영역의 경계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공공 연구기관이 decades 단위로 축적해온 실험 데이터가 AI 학습 자원으로 전환되면서, 어느 국가가 데이터를 어떻게 개방·활용하느냐에 따라 핵융합과 AI 양쪽에서 기술 격차가 재편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국가 간 경쟁 구도도 뚜렷하다. 중국은 핵융합을 미래 신산업으로 규정하고 AI 활용 핵융합 기술 개발을 국가 전략에 포함시키며 연간 15억 달러 이상을 투입하고 있다. 대형 국책 프로젝트를 통해 연구개발과 제조 역량을 공공 주도로 결집하고, 핵융합 장치와 관련 부품, 소재까지 포괄하는 내재화 공급망을 구축하는 데 속도를 내는 중이다. 미국은 다수의 민간 핵융합 에너지 기업을 중심에 두고, 정부와 연구소가 보유한 기술과 데이터를 개방해 민간이 AI와 핵융합을 결합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의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핵융합 데이터는 반도체와 클라우드에 이어 미중 디지털 패권 경쟁의 차세대 전략 자산으로 주목받는 분위기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한국 정부도 핵융합 전력 생산 시점을 앞당기는 방향으로 로드맵을 조정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제22차 국가핵융합위원회에서 ‘핵융합 핵심기술 개발 로드맵’을 심의·의결하고, 한국형 혁신 핵융합로 개발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당초 2050년대 이후로 잡혀 있던 전력 생산 목표를 2030년대로 20년가량 앞당겨, 상용화를 향한 실증 단계에 조기 진입하겠다는 전략이다.
구체적으로 정부는 2026년 한국형 혁신 핵융합로 개념설계에 착수하고, 소형 장치를 중심으로 전력 생산 능력과 안전성 등 상용화 필수 요건을 선제적으로 검증할 계획이다. 이어 2030년까지 소형화 기술 고도화와 전력 생산 기술 확보를 목표로 8대 핵융합 핵심기술을 개발하고, 2035년까지 실증을 완료하는 일정표를 제시했다. 기존 장치 중심 실험에서 디지털 트윈과 AI 기반 설계 검증을 확대해 개발 기간을 단축하려는 시도도 병행될 전망이다.
한국이 가진 자산 중 핵심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초전도 핵융합 연구장치 KSTAR다. KSTAR는 이미 1억도 수준의 초고온 플라즈마를 세계 최장 시간 유지한 실험 기록을 보유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축적된 운전 데이터 역시 방대하다. 정부와 연구진은 이 데이터를 AI와 결합해 플라즈마 거동 예측과 제어 알고리즘을 고도화함으로써, 혁신 핵융합로 설계와 실증 속도를 끌어올린다는 구상이다.
배경훈 국무조정실 부총리는 AI 활용 증가에 따라 청정에너지원으로서 핵융합 에너지의 전략적 가치가 커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술 선진국들이 핵융합을 국가 핵심 전략 기술로 지정하고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만큼, KSTAR를 통해 축적한 성과를 토대로 한국도 더 이상 추격자가 아닌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산·학·연 역량을 결집해 2030년대 핵융합 전력 생산 실증을 차질 없이 추진하고, 이를 통해 AI 시대 전력 수요 증가에 대응하면서 에너지 주권을 확보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국제적으로는 핵융합 상용화를 둘러싼 일정과 규제 틀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실증 이후 상용로 설계와 건설 단계에서는 안전 기준, 방사선 규제, 전력시장 연계 방식 등 복합적인 제도 이슈가 한꺼번에 불거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동시에 AI와 결합된 디지털 트윈 기반 설계와 운전 기술은 사이버 보안과 데이터 관리 측면에서도 새로운 규범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산업계와 정책 당국은 핵융합이 AI 인프라 시대의 필수 기반 에너지로 자리 잡을지, 혹은 규제와 투자 리스크에 가로막힐지에 따라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결국 기술 진보 속도뿐 아니라 제도 설계와 산업 구조 전환이 맞물려야 핵융합 에너지가 실제 시장에 안착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