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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가 곧 승부”…실리콘밸리, AI 벤처 투자 폭주로 거품 논쟁 자극

박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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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글로벌 IT 산업의 자본 흐름까지 재편하고 있다. AI 거품 논란이 거세지만 미국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은 되레 속도를 끌어올리며 사상 초유의 공격적 투자 경쟁에 돌입했다. 창업 초기 기업에 수십억 달러를 선제 투입하고, 아이디어가 정교하지 않아도 창업자 잠재력만으로 베팅하는 사례가 연이어 포착된다. 업계에서는 향후 18개월에서 24개월 사이에 차세대 조 단위 기업의 승패가 갈릴 것이라는 위기감이 AI 투자 가속을 부추기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사가 벤처스 설립자 벤 브레이버먼은 기업 업무 자동화 AI를 개발하는 스타트업 디랙의 25세 창업자 필립 아론슈타인을 설득하기 위해 헬스장 벤치프레스까지 함께하는 방식으로 미팅을 성사시켰다. 브레이버먼은 “기업 설립과 고객 확보, 매출 확대 속도가 모두 충격적 수준으로 빨라졌다”며 “투자자들이 이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고 말했다. 직접 표현한 대로 “속도가 곧 승부”라는 인식이 현지 투자자 사이에서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투자 유치를 둘러싼 경쟁은 과거와 다른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한 벤처캐피털은 기업가치 100억 달러로 평가되는 AI 회사 머코의 22세 공동 창업자들을 전용기에 태워 라스베이거스로 데려간 뒤 페라리를 몰게 해가며 투자를 제안했다. 다른 투자사는 대학생 인턴들에게 아예 학기 대신 스타트업 창업에 전념하라며 수만 달러를 지급하고 있다. 또 일부 벤처캐피털은 고객 연결과 인력 채용을 직접 도맡아 사실상 창업사 내부 직원처럼 움직이며 지분을 확보한다.  

 

이 같은 과열 경쟁 속에서 AI 스타트업의 기업가치는 초단기간에 천문학적으로 치솟고 있다. 2023년 출범한 세이프 슈퍼인텔리전스는 인간보다 우수한 지능을 구현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운 지 1년 만에 20억 달러 투자를 유치하며 320억 달러 가치를 인정받았다. 기업용 AI 에이전트 개발사 시에라는 2년 사이 3억 5000만 달러를 끌어모아 기업가치 100억 달러에 도달했다. AI 코딩 도구를 만드는 커서는 올해에만 세 차례 투자를 받으며 기업가치가 270억 달러로 10배 넘게 뛰었다.  

 

시장 조사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올해 9월까지 전체 벤처 투자금의 64%인 약 1610억 달러, 한화로 237조 원 규모 자금이 AI 스타트업에 쏠렸다. 앤스로픽, 오픈AI,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엑스AI 등 대형 AI 기업이 수십억 달러 단위 투자를 연쇄적으로 확보하면서 AI 분야가 벤처 자본의 사실상 ‘단일 전장’으로 굳어지고 있다.  

 

투자자들이 높은 밸류에이션을 감수하면서까지 속도를 중시하는 배경에는 향후 AI 시장이 만들어낼 조 단위 기업에 대한 기대가 깔려 있다.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 등 AI 인프라와 플랫폼을 장악한 빅테크 기업이 이미 조 단위 기업가치를 기록하고 있는 만큼, “지금 이 순간에도 차세대 조 단위 기업이 태어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AI 창업자와 투자자들을 자문하는 스미트 파텔은 “앞으로 10년간 시장을 지배할 승자가 향후 18개월에서 24개월 사이에 결정될 것이라고 모두가 느낀다”며 “이 강박감이 투자 원칙을 희석시키고 있고, 속도만이 전략인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과열과 거품 논쟁이 커지고 있지만, 실제로 일부 스타트업의 매출 성장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른 만큼 ‘원칙보다 기회’에 무게를 두는 자본 논리가 앞선다는 얘기다.  

 

실제 매출 지표만 놓고 봐도 성장 속도는 전례를 찾기 어렵다. 커서는 올해 연말 기준 연간 환산 월 매출이 10억 달러에 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1년 만에 10배 성장한 수치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는 자사 연간 환산 매출이 올해 안에 200억 달러 수준에 이를 수 있다고 내다봤다. AI 챗봇 클로드를 운영하는 앤스로픽 역시 올해 1월 약 10억 달러 수준이던 연간 환산 매출이 10월에는 70억 달러까지 커졌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성장 사례는 스타트업 생태계 전반에 ‘매출 0에서 수백만 달러까지 10일이면 충분하다’는 극단적 성공 스토리를 확산시키고 있다. 소셜미디어에는 소규모 AI 스타트업이 출시 직후 열흘 안에 연간 환산 월 매출 200만 달러를 달성했다는 식의 경험담이 숨 가쁘게 공유된다. 투자자 브레이버먼은 “투자 포트폴리오 회사들의 매출 곡선을 보면 상식으로 여겨지던 모든 규칙이 깨지고 있다”고 말했다.  

 

비브코드는 이런 과열 장세를 상징하는 사례로 꼽힌다. 앱 제작용 AI를 개발하는 이 스타트업은 당초 300만 달러를 목표로 자금 조달에 나섰지만, 제품 개발 전 단계에서 일주일 만에 1500만 달러 제안을 받았고 최종적으로 900만 달러를 유치했다. 앱 출시 직후 연간 환산 월 매출은 100만 달러로 뛰었고, 곧바로 수십 명의 투자자가 몰려들었다. 24세 공동 창업자 안쉬 난다는 “실리콘밸리가 청년에게 수백만 달러를 맡겨 꿈을 실현하게 하는 이상향 같다”고 말했다.  

 

벤처캐피털의 투자 전략도 구조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목시 벤처스는 캐나다, 프랑스, 이스라엘 등 해외에서 AI 창업자를 적극 발굴해 실리콘밸리로 유치하고 있으며, 투자자 케이티 제이컵스 스탠턴은 “급성장하기 전 단계 스타트업을 포착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성장 국면에 접어들면 기업가치가 급등해 후발 투자자의 수익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포어 캐피털은 더욱 과감한 실험에 나섰다. 과거에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창업자’에만 투자했지만 이제는 사업 아이디어가 미완성 상태여도 창업자의 역량만 보고 자금을 집행한다. 가우라브 제인 파트너는 “아이디어가 완성되길 기다리면 이미 늦다”며 “우리가 함께 아이디어를 갈고닦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학생 인턴에게 2만 5000달러에서 5만 달러를 지급해 학업 대신 창업에 전념하게 하는 프로그램을 올해부터 운영 중이며, 지금까지 약 30개 신생 기업에 자금을 지원했다. 제인에 따르면 대부분 창업자는 사업 성장에 힘입어 학교를 중퇴했다.  

 

초기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접근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최근 한 스타트업 발굴회사가 연 행사에 참가한 멀티팩터는 사람과 AI 에이전트가 계정을 공유할 수 있도록 설계된 보안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멀티팩터는 24세 CIA 출신 비벡 네어와 31세 NASA 출신 과학자 콜린 로버츠가 공동 창업했으며, 한 달 남짓한 기간에 250명 이상의 투자자들로부터 접촉을 받았다. 상당수는 화상회의를 넘어 암벽등반, 하이킹, 헬스장 운동, 스포츠 경기 관람, 핫요가 등 각종 사교 활동을 제안하며 관계 구축에 나섰다.  

 

멀티팩터는 당초 1000만에서 1200만 달러 정도를 목표로 했지만, 결국 총 4500만 달러 규모 제안을 받았다. 한 투자자는 기업가치를 1억 2000만 달러로 평가하기도 했다. 1주일간 이어진 숨가쁜 미팅 끝에 멀티팩터는 넥서스 벤처스를 리드 투자사로 선택했고, 넥서스는 1500만 달러 투자를 확정했다. 이때 산정된 기업가치는 1억 달러 수준이다. 투자가 마무리된 이후에도 추가 자금 문의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AI 기반 비즈니스 모델의 실질 매출이 빠르게 확인되고 있다는 점은 과열을 우려하는 시각과 별개로, 투자자들이 뒤처질 수 없다는 압박을 느끼게 하는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라우드 인프라에 대한 과도한 선투자 논란에도 불구하고, 실제 AI 서비스 매출이 가파르게 증가하는 한 자본은 속도를 늦추기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다만 업계 안팎에서는 이런 흐름이 장기적인 산업 구조와 규제 환경, 데이터 윤리 논의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채 자본 수익률에만 쏠려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AI 기업 가치가 실적과 무관하게 부풀려질 경우, 거품 붕괴는 AI 인프라와 반도체, 클라우드 등 연관 산업 전반에 충격을 줄 수 있어서다.  

 

실리콘밸리 내부에서는 “앞으로 2년이 AI 산업의 판도를 좌우하는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인식과 “지금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향후 10년의 기회를 영영 놓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공존하고 있다. 자본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가운데, AI 스타트업 생태계가 거품을 넘어 지속 가능한 성장 궤도에 안착할 수 있을지 산업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박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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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ai스타트업#벤처캐피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