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야를 지나 전망대로 간다”…가을 철원에서 만나는 느린 여행과 평화의 풍경
요즘 강원 철원을 향해 가을을 따라가는 이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예전엔 안보 관광지로만 여겨졌지만, 지금은 황금 들녘과 폭포, 따뜻한 만두국이 어우러진 느린 여행지의 일상이 됐다. 사소한 풍경의 조각들이 모여, 분단의 기억과 오늘의 평화를 함께 생각하게 만든다.
철원을 찾는 이들이 가장 먼저 마음을 빼앗기는 곳은 삼부연폭포다. 갈말읍 신철원리 깊숙이 들어서면 절벽 아래로 세 갈래 물길이 한 번에 쏟아져 내리는 장면이 펼쳐진다. 세 개의 웅덩이가 나란히 자리 잡은 모습이 자연이 만든 연못 같아, 사람들이 한참을 서서 물소리를 듣곤 한다. 사진을 찍으려다도 어느 순간 휴대전화를 잠시 내려두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와 안개처럼 흩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보게 된다. 진경산수화의 배경지로 꼽혀 온 이유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런 풍경은 숫자로도 확인된다. 가을 단풍철이 시작되면 강원 북부권을 찾는 방문객은 매년 늘고 있고, 폭포와 계곡을 함께 둘러보는 ‘하루 코스 여행’ 후기도 온라인에서 쉽게 눈에 띈다. 계절이 깊어질수록 삼부연 주위의 나무들은 붉고 노란 색을 더해,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을 완성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굳이 먼 산을 오르지 않아도 충분히 가을을 만날 수 있다”고 적곤 한다.
폭포에서 여운을 안고 나와 철원읍 사요리에 있는 소이산 모노레일을 타면, 풍경은 또 다른 결을 드러낸다. 왕복 1.8km를 오가는 모노레일은 소이산 정상까지 천천히 올라간다. 차창 밖으로 재송평의 들녘이 넓게 펼쳐지고, 가을이면 벼가 누렇게 익어 물결치듯 흔들린다. 바람을 따라 억새가 고개를 흔들면, 차 안은 잠시 말을 아끼게 되는 고요함으로 채워진다. 그만큼 풍경이 넉넉하다.
철원을 찾은 여행자들은 소이산을 “걷기보다 천천히 감상하는 산”이라고 표현한다. 올라가는 동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철원 평야는 도시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리듬을 보여준다. 규칙적으로 나뉜 논두렁, 느리게 흐르는 강물, 그 사이를 지나는 작은 도로까지 모든 것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트렌드 분석가들은 이런 여행 방식을 ‘풍경을 소비하기보다, 풍경에 머물고 싶어 하는 시대의 감수성’이라 부른다. 빠르게 많은 곳을 찍고 돌아다니기보다, 한 장면에 오래 앉아 있는 선택이 더 환영받는 이유다.
풍경 사이에는 언제나 한 끼 식사가 들어선다. 동송읍 장흥리의 고석정 어랑손만두국은 그런 의미에서 철원 여행자들의 숨 고르기 같은 공간이다. 직접 빚은 이북식 손만두는 속을 가득 채우고도 맛은 담백하다. 깊고도 깔끔한 국물에 만두를 한 입 베어 물면, 차가운 공기에 굳었던 몸이 천천히 풀리는 느낌이 든다. 여행객들은 “요란하지 않은 맛이라 더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자극적인 양념보다 재료 본연의 맛에 집중한 만두전골과 만두국은 북쪽에 가까운 철원이라는 지리적 분위기와 묘하게 겹쳐진다.
지역 음식 연구자들은 이런 경험을 두고 “한 끼 식사는 그 지역의 기후와 역사, 사람의 손길이 모두 섞인 작은 기록”이라고 설명한다. 철원에서 만나는 이북식 손만두도 그렇다. 분단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시간이 있지만, 식탁 위 한 그릇의 음식은 여전히 연결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여행객들이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먹는 만두라 더 뭉클하다”고 표현하는 이유다.
철원 여행의 마지막은 종종 철원평화전망대에서 마무리된다. 동송읍 중강리에 자리한 이곳은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있어, 정해진 절차를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다. 차를 타고 검문을 지나 전망대에 오르면, 비무장지대와 북한 지역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펼쳐진다. 날씨가 맑은 날, 멀리 보이는 마을과 땅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 한켠이 조용해진다. 사진을 찍는 손이 잠시 멈추는 순간도 자주 찾아온다.
전망대 주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긴다. 어떤 이들은 “교과서로만 보던 분단의 풍경을 실제로 보니 실감이 난다”고 표현하고, 또 다른 이들은 “조용히 서 있으니, 평화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고 적는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경험에 대해 “일상의 편안함을 낯선 시선으로 돌아보게 만드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눈앞의 분단 현실이, 어쩌면 지금 누리고 있는 소소한 평화와 직결된 이야기라는 깨달음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여행 정보를 공유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아이와 함께 가을 단풍도 보고, 안보 교육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다녀왔는데, 옛 기억을 많이 떠올리시더라”라는 후기가 이어진다. 세대마다 기억하는 ‘철원’의 이미지는 다르지만, 지금의 철원은 자연과 역사, 음식이 함께 어우러진 느린 여행지로 다시 쓰이고 있다.
철원에서의 하루를 떠올리면, 폭포의 물소리와 모노레일 창밖 들녘, 뜨끈한 만두국, 그리고 전망대의 고요가 차례대로 스쳐 지나간다. 특별한 체험을 하지 않아도, 그저 보고 걷고 맛본 것만으로도 마음의 속도가 조금 느려지는 느낌이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가을의 철원에서 보내는 이 하루는, 지금 이 변화를 누구나 겪고 있는 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주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