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조용히 익어간다”…가을에 걷고 먹는 사천의 하루
여행지를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다. 이제는 화려한 볼거리보다, 조용히 걷고 천천히 먹으며 자신의 속도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앞선다. 남해 바다를 품은 경남 사천은 그런 의미에서 올가을 한 번쯤 머물고 싶은 도시로 떠오르고 있다.
가을의 사천은 바닷바람이 선선해지고, 햇살이 부드러워지는 순간부터 매력이 또렷해진다. 남해안을 따라 펼쳐진 푸른 바다와 작은 섬들, 그리고 세월이 켜켜이 쌓인 유적이 어우러져 여행자를 천천히 걸어 나오게 만든다. SNS에는 사천 바닷길과 미식 인증 사진이 하나둘 올라오고, “생각보다 조용해서 더 좋다”는 반응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사천시 서포면 비토리 앞바다에 떠 있는 비토섬은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발길을 끄는 공간이다. 별주부전 전설이 깃든 섬답게, 썰물 때면 육지와 연결되는 바닷길이 열리며 한 편의 옛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갯벌에는 작은 생명들이 분주히 숨 쉬고, 가을이면 섬을 감싸는 억새가 은빛 물결을 만든다. 사람 발길이 많지 않아 고즈넉한 공기를 온전히 느끼기 좋고, 서쪽으로 떨어지는 낙조를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 감각이 느슨해진다. 뭘 하지 않아도 괜찮은 ‘멈춤의 섬’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통계청과 지방자치단체 자료에서는 최근 몇 년간 계절별 국내 여행지로 남해안의 중소도시 방문이 꾸준히 늘고 있다.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바다와 역사, 소박한 식당이 있는 곳을 찾는 흐름이 강해진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흐름을 ‘느린 미식 여행’이라고 부른다. 빠르게 소비하는 명소보다, 오래 남는 한 끼와 풍경을 선택하는 여행 방식이라는 설명이다.
사천의 여행 동선에는 자연스럽게 식당이 한두 곳씩 자리 잡는다. 사천시 노룡동의 홍바짬뽕은 그런 의미에서 ‘바다를 먹는 집’으로 기억된다. 이곳에서는 냉동 해산물 대신 매일 아침 손질한 생 홍합과 생 바지락이 국물의 중심을 잡는다. 주문이 들어가야 비로소 불이 켜지고, 커다란 웍에서는 해산물과 채소가 빠르게 숨을 죽인다. 국물은 맵기보다 깊은 향으로 다가오고, 조개살은 탱탱하게 씹힌다. 한 숟가락 뜨다 보면 “이 근처 바다에서 방금 건져 올린 느낌”이라는 손님들의 표현이 과장이 아니게 느껴진다. 짬뽕 한 그릇이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는 작은 위로가 되는 순간이다.
사천읍 수석리의 덕합반점은 또 다른 결의 ‘시간 맛집’이다. 1953년부터 한자리를 지켜온 이 중식당에는 화교의 손맛과 세월이 켜켜이 깃들어 있다. 가장 유명한 메뉴는 단연 탕수육이다. 걸쭉하면서도 단맛과 산미의 균형이 살아 있는 소스가 바삭한 튀김에 스며들면서도 마지막 한 점까지 눅눅해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듣는다. 오랜 노하우가 쌓인 조리법은 방송 출연과 ‘100년 가게’ 선정으로 공인되었고, 현관 앞에는 세대를 건너온 단골들이 남긴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아이 손을 잡고 온 부모는 “내가 어릴 때 먹던 맛 그대로”라고 표현하고, 젊은 여행자는 “낯선 도시에서 찾은 가장 편안한 맛”이라 고백한다.
사천의 매력은 배를 채운 뒤에도 계속된다. 사천시 대방동 해안가에 자리한 대방진굴항은 조선 시대 왜구를 막기 위해 인공으로 만든 군항이다. 지금은 경상남도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이곳에 서면, 잔잔한 굴항 안쪽으로 병선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서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 거북선을 숨겼다고 전해진다. 호암석축이 단단하게 둘러싼 물길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고, 가을 햇살 아래 바다 위엔 잔잔한 물결만이 천천히 움직인다.
실제로 현장을 찾은 여행자들은 “관광객으로 붐비지 않아서 오히려 풍경이 더 잘 보였다”고 느끼기도 한다.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갈매기 소리, 돌담 위로 드리운 그림자, 멀리서 들려오는 선박의 경적까지 모두가 자연스러운 배경음이 된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온라인 여행 커뮤니티에는 “사천은 유명 관광지는 아닌데, 다녀오면 꼭 ‘다음에 또 와야지’라는 생각이 든다”, “바다도 좋고 밥도 괜찮아서 부모님 모시고 가기 좋다”는 후기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을 ‘일상 회복형 여행’이라고 짚는다. 화려한 휴가보다, 전설이 깃든 섬을 걸으며 머리를 식히고, 오래된 식당에서 따뜻한 한 끼를 나누며 마음을 채우는 방식이다. 도시는 여전히 바쁘지만, 사람들은 잠시 속도를 늦출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남해의 작은 도시로 향하고 있다.
가을의 사천에서 하루를 보낸다는 건, 바닷길을 따라 걷고, 역사 앞에 잠시 멈춰 서며, 정성스러운 한 그릇을 천천히 비우는 경험에 가깝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사진첩에는 석양과 국물, 돌담과 탕수육이 나란히 저장된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이번 가을, 사천의 바다와 맛 위에서 나만의 속도를 다시 정리해 보는 것도 좋을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