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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재판 막을 플랫폼 AI감시…한국, 디지털정신건강 시험대

정하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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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을 둘러싼 온라인 여론재판이 한국 사회의 상시적 스트레스를 증폭시키는 구조로 진화하고 있다. 홍콩 유력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최근 몇 년간 한국에서 반복된 연예인 마녀사냥과 활동 중단 사례를 짚으며, 높은 사회 스트레스와 결합된 디지털 팬덤 문화가 폭발력을 키우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내 전문가들은 실명 기반 댓글제 같은 규제 논의와 더불어, 플랫폼 알고리즘과 AI 추천 시스템이 분노와 혐오를 증폭시키는 구조를 병행 점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디지털 정신건강 관리와 콘텐츠 플랫폼의 기술 책임이 맞물리는 지점이다.

 

SCMP가 주목한 사례는 이달 초 단 일주일 사이에 집중됐다. 배우 조진웅은 과거 소년원 수감 이력이 온라인에서 재확산되자 사실상 은퇴를 선언했고, 방송인 박나래는 스태프 갑질과 무허가 의료 시술 의혹 제기로 방송 활동을 멈췄다. 조세호는 조직범죄 연루 지인을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 퍼진 뒤 정규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법적 사실관계가 충분히 검증되기 전에 온라인 폭로와 여론 압박, 기업의 선제적 거리두기가 맞물리며 연예인의 커리어가 즉시 붕괴하는 전형적 패턴이라는 진단이다.

매체는 이 같은 구조가 최근에 갑자기 생긴 현상이 아니라는 점도 지적했다. 2010년 에픽하이 타블로의 학력 위조 논란, 2019년 f x 출신 설리의 극단적 선택, 2021년 배우 김선호의 허위 폭로 파문, 2023년 배우 이선균의 사망에 이르기까지, 연예인을 향한 온라인 마녀사냥과 그 후폭풍이 꾸준히 반복돼 왔다고 짚었다.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검증되지 않은 의혹이 ‘사실’처럼 소비되고, 플랫폼 추천 알고리즘이 논란성 콘텐츠를 상위에 노출하면서 파장은 짧고 굵게 커지는 구조라는 해석이 뒤따른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이 단순한 팬심의 뒤틀림을 넘어, 디지털 플랫폼 구조와 한국 사회 특유의 스트레스 환경이 결합한 결과라고 본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찬승 사회책임위원장은 사회적 압박과 좌절감이 클수록 분노를 투사할 대상이 필요해지고, 대중에 가장 노출된 연예인이 공격의 1차 대상으로 지목된다고 설명했다. 성신여대 김정섭 엔터테인먼트학과 교수는 대규모 팬덤의 이상화와 질투가 뒤섞일 경우, 논란 발생 시 집단 비난으로 빠르게 쏠리고 온라인 공간에서 공감 능력이 약화된다고 경고했다.

 

특히 이번 분석은 팬덤 문화와 플랫폼 기술 구조가 동시에 작용하는 양면성을 짚는다. K팝과 드라마를 중심으로 형성된 초대형 팬덤은 알고리즘 기반 추천 시스템과 결합해, 좋아요 수와 공유량, 시청 시간을 폭발적으로 늘리는 핵심 동력이 돼 왔다. 그러나 논란이 발생하면 같은 데이터 지표가 순식간에 역전돼, 불매 운동과 항의 댓글, 비난 콘텐츠를 상위에 올리는 추진력이 된다. 플랫폼 입장에서는 ‘참여도가 높은’ 콘텐츠를 자동 선호하는 시스템이기에, 논쟁과 분노를 활용하는 게시물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노출되는 결과가 생기기 쉽다.

 

플랫폼 기업이 활용하는 AI 콘텐츠 분석 기술은 이미 상당히 고도화돼 있다. 욕설 필터링, 명예훼손 가능성이 높은 표현 탐지, 악성 댓글 패턴 분석에 자연어 처리 기술이 적용되고 있으며, 이미지와 영상 속 자극적 표현을 실시간 모니터링하는 컴퓨터 비전 기술도 보편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다만, 연예인을 향한 조직적 마녀사냥처럼 언뜻 상식적 어휘를 사용하면서도 집단 괴롭힘을 유도하는 양상에 대해서는 탐지 정확도가 충분히 높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기술이 폭력의 양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구간이 여전히 존재하는 셈이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유사한 현상이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SNS 중심의 ‘캔슬 컬처’가 반복되며 디지털 명예훼손과 혐오 발언 억제를 위한 AI 모니터링 시스템과 법제 논의가 확대되는 추세다. 유럽연합은 거대 플랫폼에 불법 정보 신속 삭제 의무와 알고리즘 투명성 확보를 요구하는 규제를 도입했고, 일부 국가는 온라인 괴롭힘을 별도의 범죄 유형으로 규정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한국의 경우 연예인과 팬덤 중심 문화가 강해 파급 속도와 강도가 더 크다는 점에서, 디지털 정신건강과 콘텐츠 규제가 동시에 걸린 ‘고위험 집약 지대’에 해당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규제와 자율을 둘러싼 논쟁도 거세지고 있다. SCMP는 일부 전문가 발언을 인용해, 한국에서 실명 기반 댓글제와 온라인 책임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다시 힘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과거 실명제는 위헌 판단을 받은 바 있지만, AI 기반 모니터링과 결합한 ‘강화된 익명제’ 모델 등 새로운 제도 설계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지나친 실명제가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취약 집단의 발언 공간을 좁힐 수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데이터 보호와 심리 안전, 표현 자유라는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정신건강 측면에서는 디지털 환경 자체가 스트레스 순환 고리를 만들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플랫폼 알고리즘이 분노와 논쟁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반복 노출하면, 사용자 뇌는 지속적인 위협과 비교 자극에 노출되며 불안 수준이 높아질 수 있다는 연구가 축적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청년층 우울과 불안을 완화하기 위한 디지털 치료제, 정신건강 앱 등 헬스케어 기술이 개발되고 있지만, 정작 그 불안을 촉발하는 소셜 플랫폼 구조에 대한 규제와 기술적 개입은 상대적으로 더디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업계 일각에서는 플랫폼이 보유한 데이터를 활용해 집단적 마녀사냥 조짐을 조기에 탐지하는 ‘디지털 심리 경보 시스템’ 도입을 제안한다. 특정 인물이나 키워드에 대한 부정 감성 언급량이 급증하면, 알고리즘 노출 강도를 자동 조정하거나 사실확인 콘텐츠 노출을 강화하는 방식이다. 다만 이런 개입이 사전 검열 논란을 부를 수 있고, 어떤 기준으로 ‘과도한 공격’을 정의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부족해 실제 도입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전문가들은 기술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연예인을 향한 여론재판은 고도화된 디지털 플랫폼, 공격성을 키우는 알고리즘, 높은 사회 스트레스, 불신과 좌절이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라는 분석이다. 디지털 정신건강 관리, 플랫폼 책임, 알고리즘 투명성, 표현의 자유를 함께 다루는 다층적 정책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산업계는 기술과 제도가 균형을 찾으며, 온라인 마녀사냥을 실제로 제어할 수 있는 수준까지 진화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하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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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예계#온라인여론재판#scm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