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강박 노출한 노후 아파트 화재…베트남전 참전 70대, 쓰레기 더미 속 숨졌다
저장강박 의심 가구와 노후 공동주택 안전 규제가 충돌했다. 울산의 한 노후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로 베트남전 참전 유공자인 70대 주민이 쓰레기 더미 속에서 숨지면서, 지자체의 강제 개입 근거 부족과 스프링클러 미설치 문제에 대한 제도 보완 요구가 커지고 있다.
29일 울산 남구에 위치한 한 아파트는 입구부터 매캐한 공기와 탄내가 진동했다. 기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화재가 발생한 층에 오르자, 전날 진압 과정에서 사용된 소화용수가 복도와 엘리베이터 앞까지 넓게 고여 있었고, 복도 끝에는 옷가지와 가전제품, 음식물 쓰레기 등이 2m 가까이 쌓여 산을 이루고 있었다. 폐기물 처리장이나 고물상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이 쓰레기 산은 화재 당시 세대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각종 쓰레기와 폐가전을 소방 당국이 진화 과정에서 밖으로 옮기며 만들어졌다고 소방 관계자는 설명했다. 소방 당국에 따르면 현관문을 개방했을 때 집 안에는 쓰레기가 성인 남성 키 높이까지 쌓여 있었고, 생활공간 기능이 사실상 상실된 상태였다고 전했다.
불이 난 세대에 홀로 살던 70대 남성 A씨는 쓰레기 더미 위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졌다. A씨는 이 아파트에서 20년 가까이 홀로 지내온 주민이며, 베트남전 참전 국가유공자로서 매달 약 45만원 수준의 참전명예수당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들 증언을 종합하면 A씨는 수년 전부터 집 안에 쓰레기와 폐가전, 옷가지 등을 쌓아두는 저장강박 증세를 보여왔다. 한 주민은 "밖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비닐봉지에 갖가지 물건을 담아오는 모습을 흔히 봤다"며 "우리 눈에는 쓰레기지만 본인에게는 중요한 물건이라고 여긴 것 같다"고 말했다.
주변의 문제 제기와 지원 시도도 있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몇 년 전 아파트 경비를 들여 집 안 쓰레기를 모두 치우고 도배와 장판까지 새로 해준 적이 있다"며 "하지만 다시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했고, 정리를 요구하자 A씨가 법대로 하라며 강하게 반발했다"고 전했다.
지자체도 현장을 여러 차례 찾았지만 강제 조치는 이뤄지지 못했다. 울산 남구청과 동 행정복지센터 직원들은 그동안 여러 차례 방문해 청소와 정리를 권유했지만, A씨가 강하게 거부하자 법적 강제 수단이 없어 더 이상 개입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들은 악취와 해충에 오랜 기간 시달려왔다고 호소했다. 한 주민은 "창문을 열기가 힘들 정도로 냄새가 심했고 벌레도 많았다"며 "민원을 제기했지만 행정 기관에서는 본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치울 수 없다고만 설명했다"고 말했다.
이 사례는 저장강박 의심 가구에 대한 현행 제도의 관리 공백을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된다. 정신건강 문제와 결부된 생활환경 악화가 이웃의 안전과 위생 문제로 번져도, 당사자의 거부가 있으면 지자체가 강제로 개입할 법적 근거가 미비하다는 비판이다. 일부 지자체는 조례를 통해 저장강박 의심 가구 실태조사와 정리 지원 근거를 마련했지만, 남구에는 아직 관련 조례나 구체적인 지원 체계가 없는 상태다.
소방시설 사각지대도 참변을 키운 요인으로 꼽힌다. 불이 난 아파트에는 각층에 옥내소화전 1개씩만 설치돼 있었고, 화재를 자동 감지해 물을 분사하는 스프링클러 설비는 설치돼 있지 않았다. 소방 당국은 이 아파트가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 대상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해당 아파트는 총 10층 규모다. 현행 소방시설법 기준으로는 11층 미만 아파트도 일정 요건에 따라 스프링클러 설치 대상에 포함되지만, 이 아파트가 1996년 사용승인을 받을 당시에는 16층 미만 공동주택에는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가 없었다. 이후 법 개정을 통해 설치 의무가 단계적으로 확대됐으나, 개정 이전 준공 아파트에는 소급 적용되지 않아 상당수 노후 공동주택이 여전히 스프링클러 없이 남아 있다.
소방청이 2024년 6월 발표한 전국 노후 아파트 현황 자료에 따르면, 준공 후 20년이 지난 전국 노후 아파트 9천894곳 가운데 4천460곳, 비율로는 45.1퍼센트가 스프링클러 설비를 갖추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구 고령화와 1인 가구 증가 속에서 노후 단지에 거주하는 취약 계층의 화재 위험이 구조적으로 높은 셈이다.
화재는 지난 28일 오후 6시 56분께 울산 남구 한 아파트에서 발생했다. 소방 당국은 세대 내부에 쌓인 대량의 쓰레기를 걷어내며 진화 작업을 이어간 끝에 약 7시간 45분 만에 완전히 불을 껐다. 이 과정에서 70대 주민 1명이 숨졌고, 아파트 내부와 복도 일부가 불에 타 피해가 발생했다.
지자체와 중앙정부는 유사 비극을 막기 위한 제도 개선 압박을 받게 됐다. 저장강박 의심 가구에 대한 실태 조사와 정신건강·사회복지 지원 체계를 강화하는 한편, 노후 공동주택의 소방시설 기준을 재점검해 스프링클러 설치 지원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치권도 향후 국회 상임위를 중심으로 관련 법·제도 보완 논의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