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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손에 쥔 한 권의 그림책”…부산에서 만나는 세계 아동도서의 우주

정하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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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와 함께 그림책 전시를 찾는 가족이 부쩍 늘었다. 예전엔 서점 한 켠의 코너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한 도시를 채우는 축제가 됐다. 사소한 한 장의 그림에도 작가의 시간과 마음이 스며 있다는 걸, 천천히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서 알아가는 순간들이다.

 

부산 해운대 벡스코 제1전시장 3홀에서는 그런 순간을 사랑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국내 최초 아동도서전으로 자리 잡은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이 2025년 12월 11일부터 14일까지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등의 색감이 먼저 눈을 붙잡고, 아이 손에 쥐어진 그림책이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색과 선, 종이의 질감이 어우러진 작은 우주가 조용히 펼쳐진다.

국내외그림책전시부터북토크까지…‘부산국제아동도서전’ 부산에서 열린다
국내외그림책전시부터북토크까지…‘부산국제아동도서전’ 부산에서 열린다

행사의 중심은 국내외 출판사가 참여하는 대규모 부스 전시다. 최신 화제작부터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까지 한 공간에 모여, 관람객을 책 사이 산책으로 이끈다. 각 부스에서는 출판사 담당자가 기획 의도와 제작 과정을 차분하게 들려주고, 관람객은 서로 다른 나라의 글자 모양과 그림 스타일, 색감과 구성의 차이를 눈으로 비교해 본다. 아이와 함께 온 부모들은 아이의 시선이 멈춘 책 앞에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즉석에서 소리 내어 읽으며 각자의 독서 취향을 발견한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동아시아 문화콘텐츠 산업의 허브를 지향해 온 부산에선 국제영화제, 웹툰·게임 산업과 더불어 아동콘텐츠 분야에 대한 관심도 눈에 띄게 높아졌다.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이 출판사뿐 아니라 아동콘텐츠 기업, 교육 관계자까지 불러 모으는 이유다. 전시장 곳곳에 국내 그림책과 해외 도서가 나란히 배치돼, 아이를 통해 이어지는 국제 교류의 현재가 한눈에 들어온다.

 

행사장 한쪽에서 열리는 북토크는 도서전의 호흡을 더욱 깊게 만든다.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 편집자는 어린 독자를 떠올리며 한 문장, 한 장면을 완성해 가는 과정에 대해 솔직하게 표현한다. “한 번 웃고 잊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 마음속에 오래 머무는 장면을 그리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말에, 부모들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전문가들은 어린이책 제작의 본질을 “아이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다시 배우는 작업”이라고 설명하며, 한 권의 책이 완성되기까지의 긴 여정을 공유한다.

 

워크숍 공간에서는 읽기의 경험이 쓰고 그리는 체험으로 이어진다. 아이들은 연필과 색연필, 물감과 종이를 오가며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고 짧은 이야기를 지어 본다. 한쪽 테이블에서는 종이에 그은 선 몇 개가 금세 주인공이 되고, 다른 테이블에서는 서툰 맞춤법으로 적힌 제목이 작은 동화를 완성시킨다. 부모들은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며, “책 속 이야기를 따라가는 아이가 어느새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주제 전시와 특별 전시는 아동도서를 통해 동시대의 고민을 비춘다. 사회와 환경, 가족과 공동체를 다룬 그림책을 한 데 모아놓은 구역에서는, 전쟁이나 기후위기 같은 무거운 주제가 아이의 시선에서 어떻게 다르게 풀리는지 확인할 수 있다. 또 다른 공간에서는 일러스트레이션 원화와 스케치, 제작 메모가 함께 전시돼 한 장의 그림이 완성되기까지의 시간을 보여준다. 종이에 남은 연필 자국, 덧칠한 물감의 두께, 고치고 지운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린이책이 교육 도구를 넘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다가온다.

 

전문가들은 이 흐름을 “아이와 어른이 함께 성장하는 독서 문화”라 부른다. 단순한 학습 목적에서 벗어나, 감수성과 상상력을 기르는 시간이자 가족이 함께 머무는 쉼표로서의 책 읽기가 확산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 아동문학 평론가는 “좋은 그림책 한 권은 아이에게는 세상으로 향한 창이 되고, 어른에게는 잊었던 어린 시절을 불러오는 거울이 된다”고 느꼈다.

 

현장 반응도 흥미롭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아이 핑계로 갔다가 내가 더 오래 머물다 왔다”, “책을 사지 않아도 보기만 해도 마음이 채워지는 전시였다”는 후기가 이어진다. 실제로 전시장에서는 아이가 워크숍에 참여하는 동안 부모가 별도의 독서 공간에서 조용히 책을 넘기는 장면도 자주 목격된다. 예전 같으면 서점에서 재빨리 교재를 고르고 나오던 부모들이, 이제는 아이와 함께 책의 종이 질감과 냄새까지 찬찬히 음미하는 시간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의 또 다른 축은 저작권 센터다. 국내외 출판사와 에이전시, 아동 콘텐츠 관계자들이 모여 번역과 판권, 2차 콘텐츠 확장 가능성을 놓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상담 테이블 위로는 여러 언어로 인쇄된 도서 소개서와 샘플 책이 오가고, 각 나라의 독서 문화와 독자층 정보가 함께 교류된다. 한 권의 그림책이 다른 언어로 다시 태어나고,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교육 프로그램으로 확장될 여정이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된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주관하는 이번 도서전은 전시장을 하나의 공유 공간으로 바꿔 놓는다. 낮에는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과 웃음으로 가득 차고,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조용한 책장 넘기는 소리가 리듬을 바꾼다. 아이와 어른이 같은 책을 들여다보며 “나도 어릴 때 이런 이야기 좋아했어”라고 말을 건네는 순간, 세대의 간격은 조금 더 좁아진다. 책은 세대를 잇는 매개가 되고, 도서전장은 작은 도시처럼 서로의 기억이 교차하는 장소로 변한다.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은 4일 동안 부산 벡스코 제1전시장 3홀에서 열린다. 책을 통해 서로의 세계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자리다. 작고 사소해 보이는 그림책 한 장, 연필로 꾹꾹 눌러 쓴 문장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축제가 끝난 뒤에도 아이 손에 남은 촉감, 부모 마음에 남은 장면은 오랫동안 일상의 시간 속에서 천천히 되새겨질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책을 통해 오늘의 나와 아이가 어떻게 더 나답게 살아갈 것인가일 것이다.

정하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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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아동도서전#벡스코#아동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