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1919년 독립의 함성, 카이로에서 다시 만났다”…이재명, 한·이집트 평화 연대 제안

한유빈 기자
입력

식민지 지배의 기억과 분쟁의 상처를 둘러싼 서사가 다시 맞부딪쳤다. 한국과 이집트가 공유해 온 식민의 역사와 평화의 열망이 카이로 한복판에서 소환되면서, 양국 관계를 넘어 한반도 정세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20일 현지시간 이집트 카이로 대학교에서 연설을 갖고, 1919년 한국의 3·1 운동과 이집트 혁명을 함께 언급하며 양국의 역사적 유사성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지정학적 요충지로서 한국과 이집트가 겪어 온 분쟁과 식민 통치의 경험을 짚으며, 평화와 공동 번영을 향한 새로운 협력을 제안했다.

이 대통령은 “이집트와 한국은 8천㎞ 이상 떨어진 먼 나라이지만 평화에 대한 오랜 열망의 역사 앞에서 양국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운을 뗐다. 이어 “한국인과 이집트인은 지정학적 운명에 순응하며 주어진 평화를 누리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며 “따로 또 같이 써내려 가던 평화에 대한 열망은 1919년 운명과 같이 서로를 마주한다”고 말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 과정에서 1919년 3월 한반도에서 펼쳐진 3·1 운동과, 같은 해 영국 식민 통치에 맞선 이집트 혁명이 동시에 분출한 점을 상기시켰다. 이 대통령은 “한국인은 자주독립의 의지로 우렁찬 평화의 함성으로 일제의 무도한 총칼을 이겨냈다. 이집트에서도 독립의 열망을 세계만방에 알리며 분연히 일어난 이 땅의 주인들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또한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을 연합국 수뇌들이 공식 문서에 명문화한 1943년 카이로 선언이 바로 이집트에서 채택됐다는 점도 부각했다. 이 대통령은 카이로 선언을 언급하며, 한국 독립과 이집트의 지정학적 무대가 맞닿아 있던 역사적 장소성을 평화 협력의 상징으로 재해석했다.

 

한편 이 대통령은 중동 평화와 관련해 이집트의 중재 노력을 높이 평가하며 안보 의제도 비중 있게 다뤘다. 그는 “지도자의 의지와 결단도 평화를 지켜내는 핵심 요소”라고 전제한 뒤, 압델 파타 알시시 이집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휴전을 이끈 가자 평화선언에 중재국으로 참여한 역할을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알시시 대통령님은 2년간 가자지구 사태 속에서 대화를 포기하지 않으며 중재의 끈을 놓지 않았다”며 “지칠 줄 몰랐던 인내는 트럼프 대통령님과 함께 주재한 샤름엘셰이크 평화 회담의 소중한 결실로 피어났다”고 말했다. 가자 사태 장기화 국면에서 이집트가 완충 역할을 지속해 온 점을 평가하면서, 한반도 평화 구상과의 연결 고리를 분명히 한 것이다.

 

연설 후반부에서 이 대통령은 한반도 문제를 직접 거론하며 단계적 비핵화와 남북관계 전환 의지를 다시 한 번 드러냈다. 그는 “이재명 정부도 남북 적대와 대결의 시대를 끝내고 평화공존과 공동 성장의 시대를 열어가고자 한다”고 밝히며, 중동 평화 중재 사례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참고 모델로 삼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언급도 이어졌다. 이 대통령은 1978년 아랍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한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을 “두려움 없이 미래 세대를 선택한 결단”이라고 평가했다. 사다트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력까지 언급하며, ‘불편한 평화’라도 선택한 지도자의 결단을 강조한 셈이다.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이름을 하나씩 짚었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길도 다르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님을 비롯한 전임 대통령들은 금단의 선을 넘으며 한반도 평화의 새 길을 개척해 냈다”고 말했다. 과거 대북 포용정책과 남북 정상회담 등 한국의 평화 시도를 환기하며, 자신의 대북·외교 노선을 역사적 연장선상에 위치시킨 것이다.

 

정치권 안팎에선 이 대통령의 카이로 연설을 두고 이집트와의 역사·안보 연대를 적극 활용해 한반도 평화 어젠다를 복원하려는 전략적 행보라는 해석이 뒤따랐다. 중동 현안에서의 이집트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이를 남북관계 전환의 명분으로 삼겠다는 의도가 뚜렷하다는 분석이 동시에 나왔다.

 

다만 향후 구체적 정책과 일정, 북한의 반응에 따라 연설의 실효성은 달라질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이집트와의 역사적 ‘평화 링크’를 강조한 만큼, 정부는 향후 한·이집트 정상회담과 외교·안보 협의 채널을 통해 한반도 긴장 완화와 중동 평화 협력을 연계하는 방안을 검토할 전망이다. 국회 역시 남북관계 개선과 관련한 예산 및 법안 논의를 다음 회기에서 본격화할 계획이다.

한유빈 기자
share-band
밴드
URL복사
#이재명대통령#카이로선언#알시시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