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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대신 말을 건다”…완도에서 찾은 가을의 위로와 느린 시간

신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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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완도를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예전엔 멀고 한적한 섬으로만 여겨졌지만, 지금은 마음이 지칠수록 조금 느리게 쉬어 갈 수 있는 힐링의 일상이 됐다. 사색이 필요한 사람일수록 더 천천히 걸으며 바라보게 되는 섬 여행이다.

 

완도읍의 완도타워는 그런 여행의 시작점이다. 맑은 날 타워에 오르면 다도해의 섬들이 파도 위에 점처럼 흩어져 있고, 바다는 계절에 따라 다른 빛을 품는다. 주변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으면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바닷바람이 몸과 마음을 한 번에 식혀 준다. 노을이 질 무렵 발아래로 붉게 번지는 해안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를 잘 버텼다는 작은 안도감이 고요히 밀려온다.

완도타워 출처 :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
완도타워 출처 :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

보길면의 예송갯돌해변은 모래 대신 둥글둥글한 검은 갯돌이 해안을 가득 채운다. 파도가 돌 사이를 스치며 내는 소리는 파도 소리와 자갈 소리가 겹쳐진, 조금 더 깊은 울림이다. 맨발로 서 있으면 발바닥 아래로 둔탁하게 전해지는 질감이 도시의 콘크리트와는 전혀 다른 감각을 깨운다. 그만큼 말없이 앉아 있기 좋은 곳이라 여행객들도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낮추고, 휴대전화 대신 눈앞의 바다를 바라보며 긴 숨을 고른다.

 

잠시 쉬어 갈 곳을 찾는 이들에게는 완도읍의 옥카페가 작은 피난처가 된다. 방부제와 색소를 덜어낸 수제차와 음료는 화려하진 않지만, 첫 모금부터 부드럽게 스며드는 맛으로 자신을 잘 돌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여행 사이사이 이곳에 들러 따뜻한 차 한 잔을 손에 쥐고 있으면, 그동안 바쁘게 흘려보냈던 자신의 몸 상태와 감정에 조용히 귀 기울이게 된다. 그 순간만큼은 여행지가 아니라, 일상과 다르지 않은 안락한 방 한켠에 앉아 있는 기분이 된다.

 

완도는 풍경만큼 역사도 깊다. 완도읍의 장도청해진장보고유적은 통일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섬이다. 잘 정비된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으면 군사 요새였던 섬의 지형이 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로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은 어느새 지금의 바다가 아니라, 과거 바닷길을 지키던 이들의 숨결을 상상하게 된다. 복원된 유적을 마주하고 있으면 거대한 역사가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떠올리게 되고, 바람은 조금 더 묵직하게 느껴진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청산면의 영화 서편제 촬영지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청산항 뒤편 언덕에 자리한 초가집 세트장과 돌담길은 영화 속 장면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 고즈넉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 가을이면 언덕 주변이 부드러운 빛으로 물들면서 풍경이 한층 서정적으로 바뀐다.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에도 이곳은 지나치게 들뜨지 않고, 조용히 호흡을 맞추며 사진에 담긴다. 바로 뒤편의 하얀 2층집은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이기도 해, 영상 속 기억과 눈앞의 장면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여행자는 잠시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 돌담길을 천천히 걸으며 자신의 오래된 기억 하나쯤을 꺼내 보게 된다.

 

최근 여행 커뮤니티와 SNS에는 완도의 해변과 타워, 영화 촬영지를 배경으로 한 사진과 후기가 자주 올라온다. 차분한 바다와 한산한 산책로, 역사 유적과 감성적인 촬영지가 한 번에 이어지는 동선 덕분에 짧은 일정으로도 재충전이 가능하다는 반응이 많다. 사람들은 화려한 액티비티보다, 멀리까지 이어진 수평선을 조용히 바라보는 시간에서 더 큰 위로를 느꼈다고 표현한다.

 

전문가들은 이런 여행 선택을 일상의 피로를 조절하려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본다. 속도를 줄이고, 자극보다 여백을 선택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감각이 곳곳에서 공유되는 것이다. 완도처럼 자연과 역사, 이야기가 동시에 담긴 공간을 찾는 이유도 그만큼 마음이 머물 자리를 찾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여행은 거창한 계획보다, 가만히 앉아 바다를 보는 몇 분의 순간에서 기억으로 남는다. 완도의 섬들은 그 잠깐의 멈춤을 위해 충분한 공간을 내어준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신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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