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치료 데이터 플랫폼…세브란스, 발달장애 중재 연구 본격화
음악 기반 디지털 치료가 발달장애 분야 정밀의료 연구의 새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이 민윤기치료센터를 중심으로 음악치료와 웨어러블, 행동 데이터 수집을 결합한 융합 중재 모델을 확장하면서다. 방탄소년단 슈가의 고액 기부로 조성된 이 공간은 단순한 재활 프로그램을 넘어, 인지·정서·사회성 변화를 장기적으로 계량 분석하는 연구 플랫폼 역할까지 노리고 있다. 업계에서는 발달장애 영역에서 구조화된 음악치료 데이터가 구축될 경우, AI 기반 디지털 치료제와 맞춤형 중재 설계 경쟁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분석에 무게를 둔다.
세브란스병원 민윤기치료센터는 음악 기반 집단 중재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동들이 구성한 세브란스 마인드 밴드의 창단 공연을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진행했다고 10일 밝혔다. 해당 프로그램은 자폐스펙트럼 장애 아동을 대상으로 음악치료사와 임상의가 공동 설계한 구조화 세션으로, 악기 선택부터 합주 참여까지 전 과정을 치료 프로토콜에 따라 운영한다. 병원 측은 이번 공연을 장기간 중재의 중간 평가 성격으로 보고, 참여 아동의 행동 변화 데이터를 후속 연구에 활용할 계획이다.

민윤기치료센터는 2023년 9월 BTS 슈가의 50억 원 기부로 설립됐다. 센터는 방음·음향 설비를 갖춘 음악 전용 치료실, 감각 자극을 조절하는 조명 시스템, 치료 상황을 다각도에서 촬영할 수 있는 비디오 분석 환경을 포함한 인프라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세션별 영상, 음원, 생체신호, 행동 코딩 데이터 등 다층 정보를 통합 수집하는 것이 목표다. 센터는 향후 비식별화 과정을 거친 데이터셋을 기반으로 발달장애 아동 반응 패턴을 분석하는 AI 모델 개발에도 나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번 마인드 밴드 프로그램의 핵심은 아동이 직접 악기를 선택하고 합주에 참여하는 과정 자체를 치료 요소로 설계한 점이다. 참여 아동은 타악기, 색소폰, 클라리넷, 기타 등 다양한 악기 중 하나를 선택하며 자신의 선호와 의사를 표현한다. 이후 합주 단계에서는 차례를 기다리고, 다른 연주자의 리듬을 맞추며, 지휘자의 지시에 반응하는 과제를 반복 수행한다. 병원 측은 언어 소통이 어려운 아동에게서도 시선 접촉, 손 동작 조절, 공동 주의 행동 등 비언어적 상호작용 지표가 향상되는 양상이 관찰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센터는 음악치료 세션에 IT 기술을 단계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일부 세션에서는 메트로놈 기반 리듬 훈련에 웨어러블 기기의 심박수 측정을 결합하고, 고해상도 카메라로 아동의 손 움직임과 자세 변화를 기록해 운동 조절 능력의 변화를 정량화하는 방식을 시범 적용 중이다. 향후에는 소리 강도, 박자 정확도, 반응 시간 등을 자동 분석하는 소프트웨어를 도입해, 주관적 평가 중심이던 기존 음악치료를 데이터 기반 디지털 치료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이다.
발달장애 치료 시장에서는 최근 음악·소리 자극을 활용한 디지털 헬스케어 시도가 잇따르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청각 자극 패턴을 설계해 주의력 조절과 감각 과민 완화를 돕는 앱 기반 프로그램이 상용화 단계에 들어섰고, 게임화된 악기 연주 훈련을 통해 상지 운동 기능을 향상하는 재활 솔루션도 임상 검증이 진행 중이다. 다만 자폐스펙트럼장애와 같이 표현이 제한적인 아동을 대상으로 한 음악 기반 중재는 객관적 지표 설정과 대규모 데이터 축적이 어려워, 유효성을 입증한 근거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세브란스는 민윤기치료센터를 통해 이런 한계를 줄여 나간다는 전략이다. 병원 차원의 장기 추적 시스템을 활용해 동일 아동의 중재 전후 변화를 수년 단위로 관찰하고, 뇌영상 검사 결과나 심리검사 점수, 보호자 설문과 음악치료 데이터를 연계 분석하는 구조를 마련하고 있다. 센터 관계자는 음악 기반 프로그램이 단기적 감정 환기뿐 아니라 인지 처리 속도, 감각 통합, 사회적 상호작용 등 다차원 영역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계량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연구의 목표라고 설명한다.
해외에서는 음악치료와 AI 분석을 결합한 연구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미국 일부 연구기관은 자폐 아동의 피아노 연주 패턴을 머신러닝으로 분석해 정서 상태를 추정하는 모델을 개발했고, 유럽 연구팀은 드럼 리듬 반응 속도로 주의력 결핍 정도를 정량화하는 알고리즘을 실험 중이다. 국내에서는 아직 소규모 연구가 다수인 만큼, 대학병원급 치료센터가 본격적으로 데이터 수집에 나설 경우 글로벌 협력 연구 참여 여지도 커질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규제 측면에서 음악 기반 디지털 치료는 의료기기 소프트웨어와 정신건강 서비스의 경계에 놓여 있다. 국내에서는 음악치료 자체가 의료기기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특정 알고리즘이 치료 효과를 표방하며 제공될 경우 소프트웨어 의료기기 허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정신질환과 중독, 수면 장애 등을 겨냥한 디지털 치료제 가이드라인을 마련한 상태로, 발달장애 영역 음악치료 앱 역시 임상시험 설계와 유효성 검증 기준을 충족해야 상용화 단계에 진입할 수 있다.
데이터 활용 윤리도 주요 쟁점이다. 발달장애 아동 영상과 음성, 생체신호는 고도의 민감정보에 해당해, 비식별화와 보관 기간, 2차 활용 범위 등을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병원은 보호자 동의를 기반으로 연구용 데이터와 임상 기록을 분리 저장하고, 외부 AI 개발사와의 협력이 필요할 경우에도 가명 정보만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개인정보 보호를 강화하겠다는 입장이다.
현장에서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마인드 밴드 창단 공연에서 아동들은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장난감 교향곡,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러브홀릭스의 버터플라이 등 곡을 연주하며 연습의 성과를 선보였다. 김일중 아나운서가 사회를 맡았고, 발달장애 전문 연주단체와 전문 기타리스트가 함께 무대에 올라 협연했다. 티켓 수익 전액이 다시 센터 기부금으로 환류되면서, 프로그램 지속을 뒷받침하는 순환 구조도 만들어졌다.
천근아 민윤기치료센터 소장은 무대 인사에서 프로젝트 시작 당시 오늘과 같은 무대를 예상하기 어려웠다고 회상하며, 준비 과정에서 나눔이 다시 나눔을 부르는 선순환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는 마인드 프로그램과 공연 연습이 아이들에게 인내와 조율, 기다림을 학습시키는 중요한 과정이 됐다고 평가했다. 이어 방탄소년단 슈가의 기부가 이 같은 치료·연구 환경을 가능하게 한 출발점이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산업계와 의료계는 민윤기치료센터 사례가 향후 음악 기반 디지털 치료와 발달장애 정밀의료 연구의 실증 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음악치료의 임상적 가치를 데이터로 입증하고, 이를 토대로 AI 기반 중재 설계와 디지털 치료제 개발까지 확장된다면, 엔터테인먼트와 의료가 결합한 새로운 헬스케어 생태계가 열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결국 치료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데이터 윤리와 규제 체계를 정교하게 다듬는 작업이 지속 가능한 성장 조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