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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학 글로벌 우선과제 정리…WHO, 만성질환 공략 나선다

송우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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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보완·통합의학 연구의 글로벌 우선순위가 세계보건기구 차원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됐다. 고령 인구 증가와 당뇨병, 대사증후군 등 만성질환 부담이 급증하는 가운데 각국이 전통의학을 어디에, 어떻게 활용해 과학적 근거를 축적할지에 대한 국제 표준 방향이 제시됐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업계와 학계에서는 이번 결과가 전통의학을 둘러싼 ‘과학성 논쟁’을 넘어, 실제 보건의료 체계 안에서 어떤 연구에 자원을 우선 투입할지 가늠하는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한의약진흥원은 세계보건기구 제네바 본부에 파견 중인 안상영 책임연구원이 제1저자로 참여한 논문이 국제학술지 저널 오브 글로벌 헬스에 게재됐다고 밝혔다. 저널 오브 글로벌 헬스는 세계 보건 정책과 보건의료 체계, 국제 보건 이슈를 다루는 권위 있는 학술지로 분류된다. 이번 논문은 보건복지부 한의약정책관과 WHO가 체결한 양해각서를 바탕으로 추진됐으며, WHO 전통·보완·통합의학 부서가 직접 연구를 이끌었다.  

연구진은 전통·보완·통합의학, 즉 TCI 분야에서 국제사회가 우선적으로 투자할 연구 과제를 도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동안 전통의학은 여러 국가에서 의료 체계의 일부로 활용돼 왔지만, 연구 주제와 방향, 투자 전략이 국가마다 달라 근거 생산이 파편화돼 있다는 지적이 반복돼 왔다. WHO는 이 같은 상황에서 글로벌 차원의 합의된 연구 우선순위를 제시해, 각국의 정책과 연구 투자를 조정할 기준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연구에는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는 연구자 120명이 참여했다. 연구진은 국제적으로 검증된 우선순위 설정 방법인 차일드 헬스 앤 뉴트리션 리서치 이니셔티브, 즉 CHNRI 방법을 적용했다. CHNRI는 연구 과제를 안전성, 효과, 건강 형평성 기여도, 실제 적용 가능성 등 다수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점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개별 연구자의 주관을 줄이고 편향을 최소화하는 절차로 알려져 있다. WHO는 이 틀을 전통의학 분야에 그대로 적용해 글로벌 합의 수준을 끌어올렸다고 설명했다.  

 

도출된 최우선 연구 과제는 크게 만성질환 관리와 고령화 대응에 맞춰졌다. 우선 전통의학을 활용한 혈당 조절과 당뇨병 관리가 최상위 과제로 꼽혔다. 당뇨병은 대부분 국가에서 의료비 부담이 큰 대표적 만성질환으로, 기존 약물치료에 더해 한약, 약침, 식이·운동요법 등 전통의학적 접근을 병행했을 때 혈당 조절과 합병증 예방에 어떤 효과와 위험이 있는지 검증해야 한다는 의미다.  

 

두 번째 축은 노인층에서의 한약과 양약 간 상호작용 및 안전성 평가다. 고령 환자는 다약제 복용이 일반적이어서, 전통의학 처방과 서양의학 약물이 함께 사용될 때 약물 농도 변화, 간·신장 독성, 부작용 발생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연구진은 강조했다. 특히 이번 우선과제 설정은 실제 임상 현장에서 빈번하게 제기되는 안전성 논란을 근거 기반으로 관리할 출발점으로 해석된다.  

 

세 번째로 전통의학 기반 운동요법을 통한 노쇠 예방과 콜레스테롤, 중성지방 관리 연구가 핵심 분야로 제시됐다. 기공, 태극권 등 전통운동요법과 현대 재활의학, 예방의학을 결합해 근감소, 균형감각 저하, 심혈관 위험지표 개선 효과를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침, 명상, 생활습관 개선을 포함한 대사증후군 관리 연구도 우선순위에 올랐다. 복합 생활습관 개선 프로그램 속에서 침 치료나 전통 명상법이 혈압, 체중, 인슐린 저항성에 어느 정도 기여하는지 밝히는 것이 목표로 제시됐다.  

 

국가 소득 수준별로 우선순위가 다르게 나타난 점도 눈에 띈다. 연구진 분석에 따르면 고소득 국가는 인구 고령화가 이미 고착화된 만큼 노인층의 약물 안전성과 약물 간 상호작용 연구를 상대적으로 더 중시했다. 다약제를 복용하는 고령 환자에서 전통의학 치료를 추가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을 정량화하고, 안전한 병용 기준을 마련하는 과제가 정책적으로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반면 중·저소득 국가는 당뇨병 등 만성질환 관리에 전통의학을 저비용 대안으로 활용하고 있어, 그 효과를 검증하는 임상 연구를 최우선 과제로 꼽는 경향이 뚜렷했다. 의료 접근성이 낮은 지역에서 전통의학이 만성질환 부담을 줄이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수요가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이번 연구에서는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분석도 병행됐다. 연구진은 대규모 언어모델, LLM을 활용해 우선 연구 과제 후보를 도출하고, 이를 전문가 패널이 제시한 합의 결과와 비교했다. 분석 결과 전문가 중심의 논의가 실제 정책과 연구 프로그램에 적용 가능한 과제를 도출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LLM이 방대한 문헌을 빠르게 정리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국가별 보건의료 체계와 규제 환경, 문화적 수용성까지 반영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다. AI가 보조 도구로 활용되더라도 최종 우선순위 설정에서는 여전히 전문가 합의가 핵심이라는 점을 WHO가 재확인한 셈이다.  

 

연구 결과는 앞으로 WHO와 각국 정부가 전통의학 관련 연구 투자 방향과 정책, 임상 연구 계획을 세우는 데 참고 지표로 활용될 전망이다. WHO 전통·보완·통합의학 부서는 이번 우선과제를 토대로 국제 공동연구 과제 발굴, 연구비 배분 기준 마련, 전통의학 관련 임상시험 설계 가이드라인 보완 등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만성질환 관리와 노인 건강 증진처럼 글로벌 부담이 큰 영역에 전통의학을 어떻게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편입할지 논의하는 데 기반 자료가 될 수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WHO 전통의학 협력센터인 한국한의약진흥원이 국제 우선과제 설정 과정에 직접 참여한 점이 의미 있게 받아들여진다. 한의학과 서양의학이 공존하는 국내 의료 환경에서 축적된 경험과 연구 데이터를 바탕으로, 국제 논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구 어젠다를 제시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를 계기로 국내 전통의학 연구 역량이 글로벌 협력 프로젝트와 다국가 임상시험으로 확장될 여지도 커졌다.  

 

송수진 원장 직무대행은 이번 연구가 전통·보완·통합의학이 세계 보건 정책에서 과학적 근거를 갖추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연구 결과가 국제 협력 확대와 국민 건강 증진, 보건 격차 해소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산업계와 학계는 WHO가 제시한 우선순위가 각국의 연구비와 규제 방향에 실제로 어떻게 반영될지, 그리고 전통의학이 근거 중심의 글로벌 보건 전략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될지 지켜보고 있다. 산업계는 이번 우선과제가 실제 시장과 의료현장에 안착할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송우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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