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섬유화 겨냥한 PDE4D 표적…가톨릭대, 염증 동시 억제 전략 제시
간질환 말기 단계로 불리는 간섬유화의 치료 전략이 새 국면을 맞고 있다. 국내 연구진이 간섬유화 과정에서만 선택적으로 증가하는 효소를 정밀 타깃으로 제시하면서, 염증과 섬유화를 동시에 제어하는 신약 개발 경로가 열렸기 때문이다. 업계와 학계는 간이식 의존 구조를 벗어날 수 있을지, 항섬유화제 개발 경쟁의 분기점이 될 수 있을지에 주목하고 있다.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은 김정한 생화학교실 교수와 미국 국립보건원 Jay H Chung 박사가 참여한 국제 공동연구팀이 간섬유화를 획기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치료 표적을 규명했다고 26일 밝혔다. 간질환 진행의 종착역으로 불리는 간섬유화 단계에서 작동하는 정밀 표적을 확인하고, 이를 겨냥한 후보물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산업·임상적 의미가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간섬유화는 지방간, 만성 바이러스성 간염, 알코올성 간질환, 대사 기능 장애 관련 지방간염 등 다양한 간질환이 악화되면서 간 조직에 흉터조직이 과도하게 축적되는 상태를 말한다. 초기 단계에서는 체중 감량, 인슐린 저항성 개선, 바이러스 억제 같은 병인 치료를 통해 상당 부분 회복이 가능하지만, 진행돼 간경변에 이르면 비가역적인 구조 변화로 생명을 크게 위협한다. 현재 임상에서 효과가 명확히 입증된 항섬유화 약물은 없고, 말기에는 간이식이 사실상 유일한 치료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연구팀은 간질환 환자의 병기별 전사체 분석을 통해, 간섬유화 단계에서 PDE4D라는 효소가 비정상적으로 증가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PDE4 계열 효소는 세포 안에서 cAMP로 불리는 신호물질을 분해하는 역할을 하며, 여러 염증성·섬유화 질환의 조절 인자로 연구돼 왔다. 기존에도 PDE4를 넓게 억제하는 약물들이 동물모델에서 항염·항섬유화 효과를 보여왔지만, 사람에게 투여하면 오심과 구토 같은 부작용이 커 상용화에 차질을 빚어왔다.
이번 연구는 PDE4 계열 전체가 아닌, 그 안의 특정 아이소폼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 특징이다. 연구팀은 PDE4D의 여러 아이소폼 가운데 롱 아이소폼이라 불리는 형태만 간섬유화 과정에서 뚜렷하게 증가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이소폼은 같은 유전자로부터 만들어지지만 구조와 기능이 조금씩 다른 단백질 변형체를 뜻한다.
간 조직 수준의 분석과 세포 수준 실험 결과, PDE4D 롱 아이소폼은 간성상세포가 활성화될 때 크게 증가했다. 간성상세포는 정상 상태에서는 간 주변 환경을 유지하지만, 손상이 반복되면 콜라겐을 과도하게 만들어 섬유화를 일으키는 핵심 세포로 알려져 있다. 연구에 따르면 PDE4D 롱 아이소폼은 콜라겐 생성, 염증 신호 증폭, 세포 이동 촉진을 동시에 밀어 올리는 스위치 역할을 하며, 간조직 내 염증과 섬유화 반응을 관장하는 허브로 기능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이번 기술은 섬유화 반응만 차단하는 기존 접근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PDE4D 롱 아이소폼을 정밀하게 겨냥하면 섬유조직 형성과 염증 반응을 함께 낮출 수 있어, 대사성 간질환과 비알코올성 지방간염처럼 염증과 섬유화가 얽힌 질환에서 더 큰 치료 효율을 기대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연구팀은 미국 국립보건원, 시더스 사이나이 메디컬 센터와의 협업을 통해 PDE4D 롱 아이소폼만 선택적으로 억제하는 알로스테릭 저해제를 간섬유화 치료 후보물질로 제시했다. 알로스테릭 저해제는 효소의 활성 부위가 아니라 조절 부위에 결합해 구조 변화를 유도함으로써, 표적 단백질의 특정 기능만 골라 차단할 수 있는 약물 설계 방식이다. PDE4 계열 전체를 억제하는 기존 pan PDE4 저해제에 비해 부작용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글로벌 제약업계에서는 비알코올성 지방간염과 같은 대사성 간질환 치료 시장을 둘러싼 경쟁이 한층 격화되는 추세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항섬유화·항염을 내세운 후보물질들이 임상에서 잇달아 실패하거나 지연되면서, 타깃 선정의 정교함과 안전성 확보가 최대 과제로 떠올랐다. 이런 가운데 특정 아이소폼을 겨냥한 알로스테릭 저해제 전략은 기존 기전과 차별화된 접근으로 평가된다.
국내에서는 아직 간섬유화 치료제 분야에서 글로벌 선도 기업에 비해 임상 진입 단계가 뒤처져 있는 상황이다. 다만 유전체 분석, 전사체 데이터 해석 역량이 축적되면서 병기별 정밀 타깃을 발굴하는 연구는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이번처럼 간성상세포 활성에 맞춰 특정 효소 아이소폼을 골라 겨냥하는 전략은 향후 국내 바이오텍이 글로벌 기술이전이나 공동개발 협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기술 자산이 될 수 있다.
규제 측면에서는 아직 AI 기반 바이오마커 발굴이나 전사체 분석 결과를 직접적인 신약 타깃으로 활용하는 절차가 각국에서 정교하게 정립되는 단계다. 다만 미국 식품의약국과 유럽의약품청은 특정 세포집단과 기능을 분자 수준에서 연결한 연구를 평가에 적극 반영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 이번 연구가 임상시험 설계와 동반진단 개발에도 활용될 여지가 남아 있다.
김정한 교수는 중증 이상의 간섬유화가 되돌리기 어려운 질환이라는 점을 짚으면서, 섬유화 단계에서 선택적으로 증가하는 PDE4D를 표적으로 하는 전략이 전임상에서 섬유화와 염증을 동시에 줄인 결과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정밀의학 기반 간섬유화 치료제로 발전시켜 차세대 항섬유화 신약으로 연결하는 후속 개발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한국연구재단 우수신진연구, 최초혁신실험실, 기초연구실 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으며, 국제 학술지 임상연구저널 최신호에 게재됐다. 산업계는 PDE4D 롱 아이소폼 타깃 전략이 임상 개발과 기술이전 단계까지 이어져, 간질환 치료 패러다임 전환의 실질적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