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불면증치료 슬립큐…약줄이고 패턴바꾼다 산업지형도출렁
모바일 디지털 치료기기가 불면증 치료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약물 중심으로 이뤄지던 기존 치료에 인지행동치료 원리를 담은 앱이 투입되며, 병원 밖 일상 공간까지 치료 범위가 확장되는 양상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시도가 디지털헬스와 수면의학이 만나는 접점이자, 향후 정신건강 관리 시장 재편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다만 건강보험 급여 체계와 디지털 치료제 평가 기준이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어 제도 정비에 따라 산업 성장 속도가 달라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국내에서 주목받는 대표 사례가 불면증 디지털 치료기기 슬립큐다. 2023년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슬립큐를 혁신의료기기로 허가했다. 슬립큐는 한독과 웰트가 협업해 개발했으며, 만성 불면증 환자를 대상으로 6주간 인지행동치료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처방을 받은 환자는 스마트폰에 앱을 설치한 뒤 매일 잠들기까지 걸린 시간, 중간 각성 횟수, 총 수면시간, 수면의 질을 기록하고, 앱이 제시하는 수면 위생 교육과 행동 과제를 수행한다.

슬립큐의 핵심은 디지털 인지행동치료다. 인지행동치료는 밤에 누워 생각이 많아지는 인지적 문제, 잘못 굳어진 수면시간과 낮잠 습관, 잠자리에 눕기만 해도 긴장하는 조건반사 등 만성 불면증을 고착시키는 인지와 행동을 체계적으로 교정하는 치료법이다. 앱은 매일 축적된 수면 데이터를 바탕으로 취침·기상 시간대를 맞추고, 침대에서 깨어 있는 시간을 줄이도록 수면 제한 기법을 적용한다. 동시에 수면에 대한 비현실적 기대와 왜곡된 믿음을 점검하는 교육 콘텐츠를 제공해 환자가 스스로 수면 패턴을 이해하고 조정하도록 돕는다.
특히 이번 기술은 기존 대면 인지행동치료 방식의 접근성 한계를 보완했다. 대면 치료의 경우 4회에서 6회 이상 병원을 방문해 교육을 받아야 하고, 수가가 낮고 전문가가 부족해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어려웠다. 반면 디지털 인지행동치료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시간과 장소 제약 없이 교육과 과제를 수행할 수 있어, 실제 진료실에서 제공하기 힘든 고빈도 피드백과 자기기록 훈련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상시험 결과도 공개됐다. 7주 시점에 수면 효율이 기저치 대비 15퍼센트 향상된 것으로 나타나, 디지털 인지행동치료가 대면 인지행동치료와 유사한 수준의 임상 효과를 낼 수 있음을 보여줬다. 수면 효율은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 중 실제로 잠을 잔 비율을 뜻하는데, 통상 85퍼센트 이상이면 양호한 수면으로 본다. 이준희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디지털 인지행동치료가 대면 진료의 80퍼센트에서 90퍼센트 수준을 구현한다고 평가하면서도, 환자가 프로그램을 성실히 수행할수록 효과가 커지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사용자 입장에서 본 장점은 약물 의존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수면제는 단기간에는 빠른 효과를 내지만, 장기 복용 시 내성 증가와 의존성, 인지기능 저하와 같은 부작용 우려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만성 불면증 환자 상당수는 내원 시 약 처방을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수면제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디지털 인지행동치료는 약물을 쓰지 않거나 최소 용량만 유지하면서도 수면 패턴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접근으로, 약물 중단을 준비하는 환자나 처음부터 약을 피하고 싶은 환자에게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실제 임상 현장에서는 수십 년간 수면제를 복용해온 고령 환자가 슬립큐 처방 6주 후 수면 효율을 90퍼센트까지 끌어올린 사례가 보고됐다. 기존 약물 치료 시 수면 효율이 50퍼센트에서 60퍼센트 수준에 머물렀던 것과 비교하면 유의미한 변화다. 이 교수는 인지행동치료가 환자 스스로 연습하고 몸에 습관을 새기는 과정이라, 한번 패턴이 안정되면 1년에서 2년가량 효과가 지속될 수 있다고 본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이 과정을 반복 가능하게 만든 구조가 장기 치료에 특히 유리하다는 평가다.
수면의학 관점에서 디지털 인지행동치료의 산업적 파급력도 주목된다. 만성 불면장애는 3개월 이상, 주 3회 이상 입면장애, 수면 유지장애, 조기 각성 같은 증상이 지속되면서 일상 기능 저하를 동반하는 상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 기준 불면증 환자는 최근 5년 사이 32퍼센트 증가해 2023년 약 89만 명에 이르렀다. 생산인구 중심으로 수면장애와 우울, 불안, 심혈관질환 위험이 동시에 높아지는 만큼, 의료 시스템 입장에서는 조기 개입과 비용 효율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모바일 기반 치료기기는 이런 대규모 수면장애 유병 집단을 병원 밖에서 관리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디지털 치료제 경쟁이 이미 본격화된 상황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불면증과 우울증, 약물중독 등 정신건강 영역 디지털 치료제가 임상 근거를 축적하며 허가와 보험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에서 혁신의료기기 지위를 획득한 슬립큐와 같은 제품들은 아직 건강보험 급여 단계에 이르지 못했지만, 성공적인 임상 결과와 실제 사용 데이터가 축적되면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디지털 치료제 생태계 구축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규제와 수가 체계는 과제로 남아 있다. 현재 슬립큐는 비급여로 6주 프로그램 처방 시 약 20만 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대면 인지행동치료보다는 저렴한 가격이지만, 만성질환 관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적지 않은 부담이다. 일부 환자는 실손보험 적용에서도 제약을 받는다. 이 교수는 만성 불면증 환자 누구나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건강보험 급여 적용을 제안하며, 수면제 사용 감소와 장기 합병증 예방 효과까지 고려한 비용 효과 분석이 정책 논의에 반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에서는 아직 디지털 치료제를 별도 범주로 다루는 포괄적인 제도 프레임이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소프트웨어 기반 의료기기 가이드라인을 정비하고 있고, 보건 당국도 시범 사업을 논의하고 있지만, 약제와 의료기기 사이 어디에 어떻게 비용을 배분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진행 중이다. 디지털 인지행동치료처럼 환자 참여와 행동 변화를 핵심 가치로 하는 기술은 단일 처방 행위가 아니라 장기간의 서비스로 평가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인지행동치료가 수면의학을 넘어 정신건강 전반의 관리 방식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본다. 모바일 기반으로 설계된 치료 알고리즘과 행동 개입 모델은 우울, 불안, 알코올 사용 장애 등 다른 질환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고, 웨어러블 기기와 연동하면 심박수, 활동량, 수면 단계 같은 생체 데이터를 통합 분석하는 정밀의료 플랫폼으로 진화할 여지도 있다. 다만 기술 확산 속도에 비해 보험 제도와 의료 현장의 업무 구조 전환이 더디면, 디지털 치료제가 일부 고소득층과 기술 친화적 환자에게만 한정되는 새로운 격차를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준희 교수는 디지털 치료기기 도입으로 불면증 치료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환자의 꾸준한 참여와 제도적 뒷받침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업계와 의료계는 이런 기술이 실제 시장에 안착해 약물 중심 치료 구조를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지, 그리고 보험과 규제가 어떤 속도로 이를 따라잡을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