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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들께 송구하다"…권오을, 4·3 강경진압 박진경 유공자 논란에 사과

이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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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학살 책임 논란을 둘러싼 갈등과 국가보훈부가 정면으로 맞붙었다. 제주4·3 당시 강경 진압을 지휘했던 고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등록을 두고 유족과 제주 지역사회가 강력 반발하는 가운데,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이 제주 현장을 찾아 사과하며 진화에 나섰다.

 

권오을 장관은 11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참배했다. 그는 참배 직후 "유족들의 오랜 세월 아픔과 억울함을 국가가 해소해야 하는데 어제 예기치 않게 그런 기사를 봤다"며 "국가보훈부 장관으로서 희생자 유족들과 제주도민들께 정말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권 장관은 "유족들 만나 말씀을 더 드리겠지만 오영훈 지사도 만나 뵌 다음 국가보훈부의 입장, 이재명 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말씀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더 늦기 전에 왔다"고 밝히며, 논란에 대한 중앙정부의 책임 있는 입장 표명을 약속했다.

 

쟁점인 국가유공자 지정 취소 문제와 관련해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절차를 모두 검토했지만, 그것은 입법을 통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장관이 언급을 하기엔 조심스럽다"고 답했다. 이어 "현 제도에서는 등록을 취소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입법 미비 사항에 대해서는 후속 조치가 있을 것이고, 국가보훈부도 대처를 할 것"이라고 언급해 제도 개선 필요성을 인정했다.

 

참배를 마친 권 장관은 위패봉안실을 찾아 방명록에 "제주 4·3희생자와 유족들의 아픔과 억울함을 해소하도록 국가가 최선을 다하겠다"고 적었다. 직접 사과와 함께 국가 차원의 책임 이행 의지를 강조한 셈이다.

 

제주4·3평화재단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의 자리에서도 사과는 이어졌다. 권 장관은 "아픔을 치유하지는 못 해줄망정 상처를 더 냈구나라는 생각에 국가보훈부 장관으로서 상당히 송구스럽다"고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유족들의 감정을 자극한 국가유공자 등록 결정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제도적 한계를 이유로 들며 해법을 입법에서 찾겠다는 메시지를 반복했다.

 

권 장관은 이어 제주도청에서 오영훈 제주특별자치도지사와 면담을 갖고 "국가보훈부 장관으로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 폭력의 피해자인 4·3희생자의 오랜 한을 국가가 풀어줘야 하는 데 보훈부가 그러지 못했다.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하며 정부 책임을 재차 강조했다.

 

오영훈 지사는 보훈 행정 과정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지적했다. 그는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 내용만 확인했어도 박진경의 국가유공자 등록은 보류됐을 것"이라며 "신속한 제도적 보완을 통해 국가유공자 등록이 취소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상조사보고서에 이미 담긴 역사적 평가와 배치되는 결정이었다는 비판이다.

 

오 지사는 또 "제주도는 4·3 역사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박진경의 행적을 알리는 안내판을 추모비 옆에 설치하는 작업을 준비해 왔고, 오는 15일 안내판이 설치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제도적 보완이 빠르게 이뤄져 유공자 등록이 취소될 수 있도록 협력해 달라"고 권 장관에게 거듭 요청했다. 지방정부 차원의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과 중앙정부의 제도 개선 논의가 맞물리는 양상이다.

 

이번 논란의 출발점은 서울보훈지청의 국가유공자 등록 승인 결정이다. 서울보훈지청은 지난 10월 무공수훈을 근거로 박진경 대령 유족이 낸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승인했다. 이어 지난달 4일에는 이재명 대통령과 권오을 장관의 직인이 찍힌 국가유공자증이 유족에게 전달됐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제주4·3 관련 단체와 지역사회가 강하게 반발해 정치권과 정부가 파장을 수습하는 국면으로 번졌다.

 

박진경 대령은 1948년 5월 당시 제주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9연대장으로 부임해 도민을 상대로 한 강경 진압 작전을 지휘한 인물이다. 제주4·3 관련 단체들은 그를 양민 학살 책임자로 규정해 왔다. 그는 부임 한 달여 만인 1948년 6월 18일 대령 진급 축하연을 마친 뒤 숙소에서 잠을 자던 중 부하들에게 암살됐다. 이후 1950년 12월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되며 군 내부에서는 전공을 인정받았으나, 제주 지역사회에서는 오랜 기간 역사적 평가를 둘러싼 갈등의 대상이 돼 왔다.

 

박진경의 국가유공자 등록으로 4·3 희생자에 대한 국가 책임 인정과 가해 책임자에 대한 역사적 평가 사이의 균열이 다시 부각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 국회 차원의 입법 논의가 본격화될 경우, 다른 논쟁적 인물들의 보훈 심사 기준과 과거사 관련 국가유공자 제도 전반에 대한 재검토 요구로 확산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날 제주도청과 제주4·3평화공원 일대에서 이어진 권오을 장관의 사과와 면담은 여론의 비판을 의식한 수습 행보라는 평가와 함께, 향후 제도 개선 방향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을 동시에 낳고 있다. 정부와 국회는 박진경 국가유공자 등록을 계기로 드러난 입법 미비와 보훈 심사 기준 문제를 두고 추가 논의를 이어가겠다는 입장이어서, 향후 정기국회와 관련 상임위원회에서 제도 개선 논의가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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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을#제주43#박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