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세포치료 막는 법의벽”…한국, 기술력 앞서도 환자는 못쓴다
희귀 안질환과 소아암 등 난치·희귀질환 환자들이 유전자·세포치료라는 새로운 치료 옵션을 눈앞에 두고도 실제 진료실에서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연구진과 기업이 차세대 바이러스 전달체, 유전자교정, 고효율 세포치료 생산 기술까지 갖췄지만, 현행 법령 구조가 인체 내 유전물질 주입 기반 치료를 제도권 임상에서 다루지 못하게 막고 있어서다. 정부가 줄기세포·재생의료 규제 완화를 공론화하면서 의료계 안팎에서 기대가 커지고 있지만, 법 개정과 예산, 국가 차원의 플랫폼 설계까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여전히 적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25일 의료계와 국회에 따르면 첨단재생의료 및 첨단바이오의약품 안전 및 지원에 관한 일부개정법률안, 이른바 첨생법 개정안이 현재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제1소위원회에 계류된 상태다. 핵심 쟁점은 ‘인체 세포등’의 범위에 유전물질을 포함할지 여부와, 해외에서 제조·가공된 인체세포 등 수입을 허용해 임상·치료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할지에 맞춰져 있다. 개정이 지연되면서 국내에서 이미 확보한 첨단 유전자치료 기술이 실제 환자에게 이어지는 통로가 막혀 있다는 지적이 의료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입법 움직임은 여야를 중심으로 속도를 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은 지난 14일 유전물질을 인체 세포등의 정의에 포함하고 세포처리시설의 업무 범위에 수입을 추가하는 내용을 담은 첩생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앞서 6월에는 같은 당 김영배 의원이 유전물질과 핵산 물질을 인체 세포등에 포함하고, 세포·유전자치료 및 첨단 재생의료 지원기관 설립 근거를 명시한 개정안을 내놓았다. 보건복지위원회는 두 법안을 병합해 심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기술 발전 속도와 달리 제도는 뒤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최근 글로벌 연구현장에서는 인체 내에서 직접 유전물질을 주입하거나 발현시켜 질환을 치료하는 ‘생체 내 유전자치료’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유전자 결함이 원인인 희귀·난치성 질환부터 실명 위험이 높은 안질환, 일부 소아암까지 적용 영역이 넓어지는 추세다. 그러나 현행 첨생법에서는 인체 세포등의 정의 조항에 유전물질이 포함돼 있지 않아, 관련 첨단재생의료 임상연구를 제도권 안에서 추진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국내 연구자가 확보한 후보물질과 기술이 연구실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세포처리 인프라 규정도 현실과 괴리가 크다는 평가다. 현행법상 세포처리시설의 업무는 인체 세포등의 채취와 검사·처리에 한정돼 있다. 국내에서 확보 가능한 인체 세포 자원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해외에서 제조·가공된 인체 세포등을 수입해 국내 첨단재생의료 실시기관에 제공하려 해도 법적 근거가 없어 활용이 막혀 있다. 글로벌 협업을 통해 최신 세포·유전자치료 기술을 국내 환자에게 신속히 적용할 수 있는 통로가 봉쇄돼 있는 구조다.
전문가들은 문제의 핵심이 기술 부족이 아니라 ‘환자에게 기술을 전달하는 구조’의 부재라고 지적한다. 박소라 재생의료진흥재단 원장은 한국은 원천기술, 연구자 역량, 기업의 기술 수준이 이미 세계적 수준에 올라와 있다며, 환자 기반 임상·실증 생태계가 부재해 기술이 연구실에서 멈추고 있다고 진단했다. 즉, 기초·비임상 단계에서 쌓아 올린 역량이 환자 대상 임상연구와 상용화로 이어지지 못하는 단절 지점이 법·제도와 인프라에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반면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은 유전자·세포치료를 차세대 국가전략기술로 규정하고 대규모 투자와 제도 정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범부처 재생의료기술개발사업단에 따르면 글로벌 유전자·세포치료 시장은 2024년 약 139억 달러, 2033년 약 1058억 달러로 전망되며 향후 10년간 약 7.6배 성장이 예상된다. 이미 미국과 유럽은 개발, 임상, 규제 승인, 수출로 이어지는 선형 구조를 정립하며 시장을 사실상 선도하고 있다.
규제기관의 승인 현황만 봐도 격차는 뚜렷하다. 미국 식품의약국과 유럽의약품청은 지금까지 50종이 넘는 유전자·세포치료제를 승인했다. 개별 치료제 가격은 5억 원에서 40억 원에 이르며, 척수성근위축증 치료제 졸겐스마는 약 25억 원에서 30억 원, 혈우병 유전자치료제 헴겐드라는 약 40억 원에 형성돼 있다. 고가 논란에도 불구하고 치료 옵션이 공식적으로 허용되고 보험·재정 지원 방식을 병행해 제도 안으로 끌어들인 점이 특징으로 꼽힌다.
기술력에서만 놓고 보면 한국 연구진은 글로벌 정상권에 근접해 있다는 평가가 반복해서 나온다. 차세대 아데노 연관바이러스 전달체, 크리스퍼 기반 유전자교정, 고효율 세포치료 생산 공정, 희귀·난치질환 표적 유전자 후보군 발굴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의 기술 수준은 미국 대비 84퍼센트에서 90퍼센트 수준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임상과 상용화 단계에서 미국과 유럽이 치고 나가는 사이 한국은 법과 제도 허들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반복된다.
희귀질환 환자 단체들은 이번 첨생법 논의가 단순한 법 조항 개정이 아니라 국가 바이오 패권 경쟁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주혁 소아희귀난치안과질환협회 대표는 한국이 지금 유전자·세포치료 흐름에 합류하지 못한다면 치료 기회 상실을 넘어 차세대 바이오 기술패권 경쟁에서 뒤처질 위험이 크다고 경고했다. 이어 첨생법 정의 개정, 환자 기반 혁신 연구개발, 첨단바이오실증센터 구축이 이 길을 여는 핵심 축이라며, 국가 차원의 전략적 투자를 촉구했다.
예산과 거버넌스 측면의 과제도 만만치 않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와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는 유전자·세포 선도화 전략사업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설계 용역비 5억 원 증액을 기획재정부 등 관계 부처에 요청해 놓은 상태다. 이 선도화 사업은 부처, 대학, 환자단체, 기업, 산업계에 흩어져 있는 자원을 통합하고, 인공지능 기반 디지털 기술을 접목해 연구성과가 임상과 산업화로 이어지는 국가 단위 유전자·세포 전략 플랫폼을 설계하는 것이 목표다.
또한 부처별로 나뉘어 수행 중인 기능을 연계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구조 설계를 위한 정책 용역 2억 원 증액도 국회 상임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심사 중이다. 첨단재생의료 관련 기능이 보건복지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여러 부처에 분산돼 있어, 중복과 공백을 해소할 통합 구조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예산 심사 과정에서 거듭 제기되고 있다.
현장의 인식도 같다. 이주혁 대표는 복지부, 과기정통부, 식약처가 각자 임상연구, 기초연구, 규제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나 환자 중심 임상연구 활성화를 위해서는 이를 아우르는 통합적 연구 체계와 거버넌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술 개발, 규제 심사, 보험과 재정지원 논의까지 하나의 흐름에서 설계하지 않으면, 세계 최고 수준 기술이 있어도 환자는 혜택을 누리기 어렵다는 뜻이다.
의료계와 산업계에서는 첨생법 개정과 예산 확보, 국가 전략 플랫폼 설계가 맞물려 돌아갈 때에야 한국이 유전자·세포치료 글로벌 경쟁에 본격적으로 합류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첨단재생의료 기술이 실제 시장과 의료 현장에 안착할 수 있을지, 그리고 기술과 제도가 환자 중심으로 얼마나 빠르게 재구성될 수 있을지에 산업계와 환자 단체의 시선이 쏠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