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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신뢰 회복 계기돼야"…전국법관대표회의, 여권발 사법개혁 놓고 숙의 착수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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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개혁을 둘러싼 여권과 법조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정기회의를 열고 쟁점 법안들에 대한 입장 정리에 착수했다. 내란전담특별재판부 설치와 법왜곡죄 도입 등 정치권 논쟁의 중심에 선 사법제도 개편을 두고, 일선 법관들의 조직적 의견 표명이 이뤄질지 주목된다.

 

전국법관대표회의는 8일 오전 10시 7분께 경기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정기회의를 열고 사법제도 개선과 법관 인사·평가제도 변경 등 두 개 안건을 논의했다. 각급 법원 법관대표 126명 가운데 84명이 온·오프라인으로 출석해 정족수를 채웠다.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전국 각급 법원에서 선출된 대표 판사들이 모인 회의체로, 사법행정과 법관 독립에 관한 의견을 표명하거나 대법원에 건의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여권이 추진하는 사법개혁 법안들에 대해 법원 내부 공식 의견이 나올 수 있는 창구라는 점에서, 이날 회의 결과에 정치권의 이목이 쏠렸다.

 

김예영 전국법관대표회의 의장(서울남부지방법원 부장판사)은 모두발언에서 현재 국회 논의를 둘러싼 사법부의 책임을 강조했다. 그는 "현재 국회에서 사법제도에 관한 여러 중요 법안들이 논의 중이고,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며 "법관들이 재판에 관한 전문성이나 실무경험에서 나오는 의견들을 국민들께 상세히 말씀드리는 것 또한 책무라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어 법관 내부의 견해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토론의 필요성을 거듭 부각했다. 김 의장은 "법관은 동일체가 아니다. 법관들의 생각은 매우 다양하고, 오늘도 치열한 토론이 예상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모든 법관은 정치권과 학계, 시민사회의 논의를 존중할 뿐 아니라 재판을 담당한 법원 의견도 고려해 국민의 요청과 기대에 최대한 부합하는 제도 개선이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오늘 논의가 사법 신뢰 회복과 사법제도 개선에 기여하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하며 회의의 의미를 재차 설명했다. 정치권 공방 속에서 법관이 직접 제도 개선 논의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취지로 읽힌다.

 

이날 회의에는 사법제도 개선 방향과 관련한 재판제도 분과위원회 발의 안건 1건, 법관 인사·평가제도 변경을 다룬 법관인사제도 분과위원회 발의 안건 1건이 사전에 상정됐다. 재판제도 분과위 안건에는 사법제도 개선 과정에서 국민의 기대와 요구, 그리고 일선 법관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돼야 한다는 취지가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법관인사제도 분과위가 발의한 안건에는 법관평가제도 개편을 둘러싼 우려가 포함됐다. 특히 성급한 법관평가제도 변경 추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반영돼, 법관 독립과 재판의 질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한 논쟁도 이어질 전망이다.

 

전국법관대표회의는 또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사법개혁 관련 핵심 쟁점에 대해서도 의견을 청취하고 논의할 계획이다. 법원행정처 폐지와 사법행정위원회 구성, 내란전담특별재판부 설치, 법왜곡죄 도입 법안 등에 관한 법원행정처 입장을 듣고, 법관대표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절차가 이어질 예정이다.

 

내란전담특별재판부와 법왜곡죄 신설은 최근 정치권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을 불러온 안건이다. 특정 사건을 겨냥한 재판부 구성 아니냐는 논란과 함께, 형사법 체계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사법부 일각에서도 위헌 소지가 크다는 판단이 공개적으로 나온 상태다.

 

이보다 앞서 지난 5일에는 천대엽 법원행정처장 주관으로 전국법원장회의 정기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전국 법원장급 고위법관들은 내란전담특별재판부 설치와 법왜곡죄 신설 등 사법개혁 추진 법안에 대해 "위헌성이 크다"며 강한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발언은 사법부 수뇌부가 여권 입법 드라이브에 사실상 제동을 건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이번 전국법관대표회의는 법원장회의에 이은 일선 판사들의 조직적 논의라는 점에서 무게가 작지 않다. 상급 법관회의에서 제기된 우려에 하급심 법관들이 어떻게 화답할지, 또 양측 견해가 얼마나 수렴될지에 따라 사법부 전체의 공식 입장 성격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날 상정된 안건이 곧바로 공식 입장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전국법관대표회의 규정에 따라 안건이 공식 입장으로 채택되려면 출석한 법관대표 과반수의 찬성이 필요하다. 정족수에 미달할 경우 안건은 부결되고, 개별 법관이나 법원 차원의 문제 제기 수준에 머물게 된다.

 

정치권도 전국법관대표회의 논의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여권은 사법개혁 의제에 대한 국민 여론을 내세우며 입법 추진에 속도를 내고 있고, 야권은 사법부 독립 침해와 위헌 소지를 전면에 내세워 강력 반발하고 있다. 여야 공방 한복판에서 법관대표회의가 어떤 메시지를 내놓느냐에 따라 입법 동력과 정국 구도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사법부 안팎에서는 법관대표회의가 특정 법안 찬반을 단정적으로 결론내기보다, 절차적 정당성과 헌법질서 수호, 재판 독립 원칙 등을 중심으로 원칙적인 의견을 제시할 것이란 전망이 제기된다. 그러나 내란전담특별재판부와 법왜곡죄처럼 정치 쟁점성이 강한 사안의 경우, 강도 높은 표현이 포함된 입장이 도출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는 분석이 뒤따른다.

 

이날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상정 안건에 대한 토론을 마친 뒤 표결 절차를 거쳐 공식 입장 채택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사법부 내부 논의 결과에 따라 국회 논의는 추가 진통을 겪을 수 있으며, 정치권과 사법부 사이 긴장 관계도 한층 더 날카로워질 수 있다.

 

국회는 사법개혁 법안을 둘러싼 여야 대치를 이어가는 가운데, 향후 회기에서 관련 법안 심사를 계속할 계획이다. 사법부는 법관대표회의와 법원장회의에서 제기된 의견을 바탕으로 국회와의 협의를 모색하는 한편, 제도 개선 논의 과정에서 사법 신뢰 회복 방안을 함께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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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법관대표회의#김예영#내란전담특별재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