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질환 잡는 AI 초음파 등장…삼성메디슨, R20로 진단 표준화 노린다
간 초음파 진단이 인공지능 기반으로 고도화되며 검사자 숙련도에 따른 편차를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간은 기능의 70퍼센트가 손상될 때까지 뚜렷한 증상이 잘 나타나지 않아 정기적인 영상 검사가 핵심인데, 그동안 초음파 판독은 의료진 경험과 기술 수준에 크게 의존해 왔다. 업계에서는 AI가 간 조직을 자동 분할하고 지방간 정도를 수치화하는 기술을 실제 장비에 탑재한 이번 시도를 간 영상 진단 경쟁의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간은 해독과 영양소 대사, 면역 조절 등 500가지가 넘는 기능을 수행하는 대표적인 침묵의 장기다. 정상 성인의 체중 약 2퍼센트를 차지할 만큼 큰 장기이지만, 조직의 30퍼센트만 남아도 기능을 유지할 정도로 예비력이 크다. 이런 특성 때문에 지방간이나 간경변, 초기 간암 등 주요 간질환은 자각 증상이 거의 없어 영상검사가 조기 발견의 사실상 유일한 수단으로 꼽힌다.

초음파는 간을 관찰하는 데 가장 폭넓게 쓰이는 도구다. 간은 복부 내에서 크기가 크고 비교적 균질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혈관 패턴과 병변의 대비가 잘 드러난다. 이 덕분에 지방간, 간경변, 종양 등 다양한 질환의 선별과 추적 관찰에 활용돼 왔다. 다만 검사자의 손기술과 경험에 따라 간 단면을 어떻게 잡는지, 지방 침착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등이 달라질 수 있어 진단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었다.
삼성메디슨은 지난 9월 대한영상의학회 KCR 2025에서 이런 한계를 정면 겨냥한 프리미엄 초음파 진단기기 R20을 국내에 공개했다. R20의 핵심은 딥러닝 기반 인공지능 보조 기능인 라이브 리버 어시스트다. 이 기능은 초음파 영상에서 간 영역을 자동으로 찾아 분할하고, 표준화된 단면과 측정 위치를 제시해 의료진의 주관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됐다.
라이브 리버 어시스트는 간 관련 관심 영역을 자동 분할할 때 단면 분할 정확도 지표인 다이스 스코어가 0.94 이상으로 보고됐다. 다이스 스코어는 AI가 표시한 간 경계와 전문가가 표시한 실제 경계가 얼마나 겹치는지를 0에서 1 사이 값으로 나타내는 통계 지표다. 1에 가까울수록 완벽히 일치한다는 의미여서 0.94는 임상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수준으로 평가된다. 측정 오차율도 5퍼센트 이하로 제시돼 반복 검사의 신뢰도를 높이는 기반이 된다.
R20에는 간 지방 정량화에 초점을 맞춘 여러 AI 기반 기능이 결합돼 있다. 티에이아이 기술은 초음파 신호가 간세포 내 지방에 의해 얼마나 약해지는지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지방간 정도를 수치로 환산한다. 기존에는 영상의 밝기나 질감 등을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감쇠 계수를 정량화함으로써 추적 관찰과 치료 반응 평가에 활용도가 높아질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티에스아이 기능은 조직 산란 분포를 정량적으로 측정해 지방이 축적될수록 달라지는 초음파 산란 패턴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지방간이 어느 단계까지 진행됐는지, 간 섬유화가 동반되고 있는지 등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 비침습적 정밀 진단 도구로 주목된다. 두 기술을 함께 활용하면 단순 지방간부터 진행성 비알코올성 지방간염까지 스펙트럼을 세분화해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으로 꼽힌다.
R20에 적용된 에스 쉬어웨이브 이미징은 조직 탄성도를 수치와 색상 지도로 동시에 제시하는 초음파 탄성영상 기술이다. 간 조직이 딱딱해질수록, 즉 섬유화가 진행될수록 전단파 속도가 빨라지는 원리를 이용해 간경변 진행 정도를 간접 평가한다. 같은 플랫폼이 유방, 근골격계 등 다양한 부위에도 적용 가능해 장비 활용도를 높이는 효과도 있다.
업무 효율을 강화하기 위한 자동화 기능도 탑재됐다. 이지에스더블유아이 기능은 에스 쉬어웨이브 이미징 검사 과정에서 가장 적합한 영상과 측정 위치를 AI가 자동 추천한다. 그 결과 관심영역 설정과 반복 측정 과정에서 필요한 키 입력 횟수를 수동 대비 약 70퍼센트 줄여 의료진 피로도를 낮추고, 병원 회전율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글로벌 의료기기 업계에서는 영상의학 분야를 중심으로 AI 초음파 경쟁이 이미 본격화된 상태다. 북미와 유럽에서는 심장 초음파에서 자동 심실 용적 측정, 태아 초음파에서 태아 체중 자동 계산, 근골격 초음파에서 염좌 부위 탐지 등 다양한 AI 보조 기능이 상용화돼 있다. 여기에 간질환의 유병률이 꾸준히 증가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지방간과 간섬유화를 동시에 정량화하는 간 특화 AI 기능은 국내외 시장에서 차별화 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간 분야는 방사선량이 없는 초음파 검사로 자주 평가할 수 있고, 고품질 데이터 확보가 상대적으로 용이해 AI 기술과 시너지가 큰 영역으로 꼽힌다. 다만 국내에서는 AI 기반 초음파 분석 기능이 대부분 진단 보조 용도로 분류돼, 보험 수가 체계나 책임 소재 등 제도적 뒷받침은 여전히 논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실제 진단 행위로 어느 범위까지 인정할지, 결과 오판에 대한 법적 책임을 어떻게 나눌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재영 서울대학교병원 영상의학과 교수는 간은 초음파로 가장 자주 평가되는 장기이자 AI와 첨단 초음파 기술의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는 영역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AI 기능과 고급 영상 기술이 결합된 R20이 도입되면 간 초음파의 진단 정확도와 검사 편의성이 모두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업계에서는 간질환 유병률 증가와 의료 인력 부족 문제가 맞물리면서, AI 초음파가 표준 진단 도구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술 발전 속도만큼 제도와 임상 가이드라인 정비가 뒤따라야 한다고 입을 모으며, 기술과 윤리, 산업과 규제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간질환 관리 패러다임 전환이 가능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