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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거품은 없다 배경훈 부총리 국산 AI로 노벨상 도전 전망

권혁준 기자
입력

인공지능 기술이 한국 과학기술과 산업 전반의 패러다임을 재편하는 촉매로 부상하고 있다. 정부와 대기업이 동시에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며 AI 인프라와 기초 모델 경쟁력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어서다. 업계에서는 이번 행보를 두고 단기 성과를 둘러싼 거품 논쟁이 아니라, 2030년까지 이어질 AI 패권 경쟁의 분기점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정부가 국산 AI 칩과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과학기술 연구용 특화 모델까지 동시에 추진하면서 AI 기술을 국가 연구개발 시스템에 깊이 통합하려는 구상이 구체화되고 있다.

 

배경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겸 부총리는 출입기자단 송년 간담회에서 최근 제기되는 AI 거품론에 대해 투자 위축을 우려했다. 그는 과거 기업들이 AI 투자를 둘러싼 효용성 논쟁과 수익성 불확실성 때문에 주저하면서 한국이 글로벌 경쟁에서 선제적으로 치고 나갈 기회를 놓친 측면이 있다고 짚었다. 동시에 최근 국내 기업들이 그래픽처리장치 26만장 확보에 나선 점을 들어, 이제는 인프라 부족이 아니라 활용 전략과 성과 창출 역량이 관건이 되는 국면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배 부총리는 정부 의지만으로는 AI 강국으로 도약하기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민간 기업이 대규모 GPU 클러스터와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 이를 연구기관과 스타트업이 함께 활용할 수 있는 생태계가 조성돼야 투자 선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기업의 GPU 투자가 사업 현장과 연구계에서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져 국내총생산 성장률을 3퍼센트포인트 이상 끌어올리는 수준까지 연결된다면, AI 투자는 지속적으로 확대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단순한 인프라 보유 경쟁을 넘어 실사용 가치와 경제 효과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다만 배 부총리는 거대 생성형 AI를 소수 글로벌 기업이 독점하는 구조가 한국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특정 플랫폼이 시장을 장악하면 국내 기업과 연구기관은 API를 빌려 쓰는 수준에 머물고, 핵심 기술과 데이터, 알고리즘 주권을 확보하지 못한 채 종속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그는 국내 민간·공공 부문이 함께 국산 파운데이션 모델과 AI 칩을 키워야만, 한국이 향후 AI 시대의 표준과 규칙 논의에 참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배 부총리는 특히 저전력·저가 AI 칩의 전략적 의미를 강조했다. 올해 초 중국의 딥시크가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하드웨어 환경에서도 글로벌 수준에 근접한 성능을 보여주자, 고성능 GPU 독점 구조가 흔들릴 수 있다는 신호로 시장이 반응한 사례를 언급했다. 이때 엔비디아 주가가 급락한 것은 꼭 같은 수준의 GPU가 아니어도 충분한 성능의 AI를 구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부각된 결과로 해석했다. 기존에는 초고성능 GPU 중심으로만 AI 성능이 논의됐다면, 이제는 알고리즘 최적화와 경량화, 메모리 효율 등을 종합한 새로운 경쟁 축이 형성되고 있다는 의미다.

 

국내에서는 신경망처리장치 중심의 국산 AI 칩 개발이 본격화되고 있다. 배 부총리는 내년부터 서버용과 엣지용 AI 칩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것으로 전망했다. 서버용은 데이터센터와 대규모 학습 인프라에, 엣지용은 스마트폰, 사물인터넷, 산업용 로봇 등 말단 디바이스에 탑재돼 추론 작업을 수행하는 구조다. 고성능 GPU 대비 연산 효율당 전력 소모와 비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설계된 이들 칩은, 대규모 모델 학습은 글로벌 GPU를 활용하더라도 실제 서비스 배포 단계에서는 국산 칩 사용 비중을 늘릴 수 있다는 기대를 낳고 있다.

 

배 부총리는 국산 AI 칩 상용화를 위해 무엇보다 레퍼런스 구축이 중요하다고 봤다. 일정 수준 이상 성능과 안정성이 검증된 사례를 확보해야 해외 시장에서도 경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와 공공 부문이 초기 수요처로서 마중물 역할을 수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공공 클라우드, 스마트시티, 공공 안전, 행정 시스템 등에서 국산 AI 칩과 모델을 우선 적용해 성능과 신뢰성을 입증한 뒤, 이를 기반으로 수출과 글로벌 파트너십을 확대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시도가 앞으로 5년에서 10년에 걸쳐 한국 AI 산업의 구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국산 AI 모델의 성능 논쟁에 대해서도 보완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최근 일부 평가에서 국내 모델이 대학수학능력시험 유형 문제 풀이 등에서 글로벌 거대 모델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데 대해, 배 부총리는 추론형 AI의 성능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고품질 데이터셋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과학, 공학, 수학처럼 구조화가 가능한 분야의 데이터는 일반 웹 텍스트와 달리 전문가가 직접 설계하고 정제해야 하며, 이 작업이 부족했던 것이 한계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데이터셋 구축을 장인 작업에 비유했다. 수학과 과학 개념을 기계가 이해할 수 있는 수식, 그래프, 논리 단계로 재구성하고, 문제와 해설, 증명 과정을 체계적으로 태깅해줘야 모델이 고난도 추론을 학습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단순 문장 예시를 많이 주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인간 전문가가 각 과목별로 AI 학습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학 문제의 경우 텍스트 설명을 기호 논리와 구조화된 표현으로 변환하는 전처리 기술이 중요하다고도 덧붙였다.

 

이 같은 전략의 핵심으로 배 부총리가 꼽은 사업이 국가대표 AI를 선정·육성하는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이다. 이 사업은 한국어와 한국 데이터에 최적화된 기초 모델뿐 아니라, 법률, 의료, 과학 등 전문 영역별 추론형 모델을 동시에 육성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그는 내년 1월 발표될 1차 평가에서 국산 모델이 글로벌 대표 파운데이션 모델의 90퍼센트 수준 성능을 달성하는 것을 첫 단계 목표로 제시했다. 이어 2차 평가가 예정된 내년 6월에는 최소 상위 10위권 모델에 진입하는 성과를 내겠다고 밝혔다.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과 연계될 또 다른 축이 과학기술 연구 혁신 프로젝트인 AI 포 사이언티스트다. 이 프로젝트는 물리, 화학, 생명과학, 소재공학 등 다양한 연구 분야에서 AI를 연구 동료로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단백질 구조 예측, 신약 후보 물질 탐색, 신소재 조성 추천, 실험 설계 자동화 등에서 이미 글로벌 선도 사례가 나온 만큼, 한국도 자체 특화된 과학용 파운데이션 모델을 구축해 실험과 이론 연구 생산성을 동시에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다.

 

정부는 AI 포 사이언티스트를 통해 축적한 과학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과 연동해 시너지를 내겠다는 계획이다. 예를 들어 일반 언어 모델이 논문과 특허를 폭넓게 이해하고, 과학 특화 모델이 실험 조건과 수치 계산을 담당하는 방식으로 융합하면, 신약개발과 차세대 배터리, 기후모델링 등 대형 국가 과제의 연구 기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이는 단순 성능 지표 경쟁을 넘어, 실제 과학 성과로 이어지는 AI 활용의 모범 사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배 부총리는 이런 연구 생태계가 자리 잡으면 2030년 전후로 노벨상에 도전할 만한 성과가 나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과학기술과 AI가 동료 연구자로 협력하는 구조가 완성되면, 기존 방식으로는 수십 년이 걸렸을 난제를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연구자 주도성과 데이터·알고리즘 투명성, 연구 재현성 확보 등 AI 활용 연구의 윤리와 신뢰성 문제도 병행해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유럽이 이미 AI와 과학 연구의 결합을 국가 전략 과제로 올려놓고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들은 슈퍼컴퓨터와 AI를 결합한 시뮬레이션 연구를 확장하고 있으며, 유럽연합도 과학 데이터 공유 인프라 구축과 AI 기반 연구 플랫폼 개발에 투자를 늘리는 중이다. 중국 역시 자체 반도체와 대형 모델을 결합한 국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이미 AI 인프라, 기초 모델, 반도체, 데이터 거버넌스를 둘러싼 복합 경쟁이 본격화된 상황이다.

 

국내에서는 이러한 글로벌 흐름 속에서 AI 거품론과 과잉 투자 우려가 동시에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GPU와 데이터센터 투자 규모에 비해 단기 매출과 수익이 따라가지 못하고, 전력 수급과 환경 부담도 커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 국산 NPU와 모델 개발에 공공 자금이 집중될 경우, 중복 투자와 민간 혁신 위축을 부를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반면 AI 인프라와 기초 모델을 제때 확보하지 못하면 향후 산업 전반이 글로벌 플랫폼에 종속될 수 있다는 위기감 역시 크다.

 

과기정통부는 이런 논쟁 속에서도 민관 협력을 통한 AI 생태계 조성 방향은 유지하되, 실제 이용률과 성과 지표를 기반으로 투자 규모와 방향을 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GPU 26만장 확보와 국산 NPU 개발이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과 AI 포 사이언티스트, 공공 레퍼런스 구축으로 이어지는 패키지 전략이어야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산업계와 학계, 정부가 함께 성과와 위험을 평가하며 조정하는 거버넌스 정립도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AI 인프라 구축과 기초 모델 경쟁, 과학 연구 방식의 전환까지 한꺼번에 진행되는 만큼, 한국 AI 전략은 당분간 투자와 규제, 윤리와 글로벌 협력 간 균형을 시험받을 전망이다. 산업계와 연구계는 AI가 단기 거품 논쟁을 넘어 실제 시장과 연구 현장에서 어떤 성과를 만들어낼지, 그리고 그 성과가 2030년 한국 과학기술의 위상을 어디까지 끌어올릴지 주시하고 있다.

권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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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훈#독자파운데이션모델#ai포사이언티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