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민생 10대 프로젝트 가동…정부, R&D 대수술로 혁신 속도전
AI 기술을 민생과 국가 전략에 동시에 투입하는 대규모 정책 전환이 시작됐다. 4년 만에 재가동된 과학기술관계장관회의에서 정부는 AI 민생 10대 프로젝트, R&D 예비타당성조사와 PBS 단계적 폐지, GPU 인프라 확충, 국가과학자 제도 도입 등 과학기술과 인공지능 전반을 아우르는 개편안을 일괄 공개했다. 일상 영역에서는 AI 기반 공공서비스로 체감 효과를 빠르게 내고, 연구 현장에서는 실패 부담을 줄이며 속도를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업계와 연구계에서는 이번 조치가 AI 경쟁과 R&D 체제 개편의 분기점이 될 수 있는지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첫 회의에서 정부는 일상생활에 바로 적용되는 AI 민생 10대 프로젝트를 최우선 과제로 올렸다. 소비와 생활, 국민 편의, 사회 안전 등 3개 축에 AI를 접목한 공공서비스를 단기간에 구축해 기술 혜택을 국민 전반으로 확산시키겠다는 전략이다. 소비와 생활 분야에서는 AI 농산물 알뜰 소비정보 플랫폼으로 가격과 수급 정보를 정교하게 제공하고,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하는 AI 창업 경영 컨설턴트로 상권 분석과 마케팅 전략을 자동 제안하는 구조를 계획했다. 인체적용제품 AI 안전 지킴이는 화장품과 생활용품 등에서 유해 가능성을 사전 분석하고, 국가유산 AI 해설사는 문화재와 유적지에 대한 맞춤형 설명을 제공하는 디지털 가이드 역할을 맡는다.

국민 편의 영역에서는 세무, 민원, 인허가 등 행정 서비스에 대형 언어모델 기반 상담 기능을 도입한다. AI 국세정보 상담사는 복잡한 세법과 신고 절차를 질의응답 형태로 안내하는 역할을 하며, 국민 경찰 민원 챗봇 모두의 경찰관은 치안 관련 민원 접수와 절차 안내를 24시간 자동 처리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인허가 절차 전반을 안내하는 AI 인허가 도우미는 규제와 제출 서류를 자동 안내해 행정 소요 시간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정부는 이러한 서비스가 국민이 마주하는 첫 AI 공공 접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사회 안전 분야에서는 범죄와 위기 상황에 대응하는 AI 기반 감시 분석 기술이 핵심으로 꼽혔다. AI 기반 보이스피싱 공동 대응 플랫폼은 금융정보와 신고 데이터를 통합 분석해 신종 사기 패턴을 조기에 탐지하는 방식으로 설계된다. 온라인 성착취, 아동 청소년 위기 대응 시스템은 텍스트와 이미지, 영상 콘텐츠를 동시에 분석해 불법물 유통과 위험 신호를 조기에 포착하는 기술이 적용된다. 밀입국과 불법 어선, 안보 위협에 대응하는 해양 위험 분석 AI는 해상 레이더와 위성 영상, 선박 위치 데이터를 융합 분석해 이상 징후를 탐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는 기존 수동 모니터링의 한계를 줄이고, 방대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방식의 한계를 넘어설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정부는 AI를 과학기술 연구의 고도화에도 정면 배치한다. 과학기술×AI 국가전략을 통해 R&D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겠다는 구상이다. 우선 바이오,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 학문적과 산업적 파급력이 큰 6대 분야에서 과학기술 AI 파운데이션 모델을 개발한다. 파운데이션 모델은 대규모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전 학습된 범용 AI 모델을 뜻하며, 이를 특정 연구 분야에 미세 조정해 난제 해결과 설계 최적화에 활용하겠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실험 조건 설계와 소재 후보 탐색, 공정 변수 최적화 등에서 예측 정확도를 높여 연구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다.
연구자와 함께 가설 생성부터 실험 설계, 결과 분석까지 전 과정을 수행하는 AI 연구동료도 본격 확산한다. 이는 인공지능이 논문과 데이터베이스를 학습해 연구 주제를 제안하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실험 성공 가능성이 높은 조건을 추천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고가 장비와 로봇 자동화가 결합된 자율실험실은 24시간 365일 실험을 수행해, 반복 측정과 변수 탐색에 필요한 시간을 크게 줄이는 역할을 맡는다. 글로벌 제약·소재 기업들이 도입 중인 자율실험 플랫폼과 유사한 구조로, 국내 연구 현장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러한 AI 연구 생태계를 뒷받침하기 위해 GPU 등 연산 인프라도 확충된다. 정부는 과학기술 AI 전용 GPU 8000개 이상을 확보해 출연연과 대학, 연구기관에 지원하고, 기관별로 흩어져 있는 GPU 자원을 공동 활용하는 통합 체계를 구축한다. 이는 개별 연구실이 고가의 장비를 중복 투자하지 않고도 대규모 모델을 학습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동시에 연구데이터법 제정을 추진해 데이터 수집과 공유, 활용 규범을 정비하고, 국가 연구데이터댐을 구축해 연구 데이터를 장기적으로 축적 관리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데이터 형식 표준화와 품질 관리 규정을 통해 AI 학습에 적합한 데이터 환경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인재 측면에서는 과학기술과 AI를 결합한 이른바 양손잡이 인재 양성이 핵심 키워드로 제시됐다. 과학고와 영재학교, 4대 과학기술원과 주요 대학에 AI 교육과정을 결합해 AI AX 과학영재학교와 AI 단과대를 신설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공학과 기초과학 전공자가 딥러닝, 데이터사이언스, 알고리즘을 함께 익히도록 교육 구조를 바꾸겠다는 의미로, 향후 산업현장에서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융합형 연구자가 늘어날지 관심이 쏠린다.
회의에서는 AI와 별도로 R&D 생태계 구조를 바꾸는 대대적 개편안도 확정됐다. 우선 연구자가 목표 달성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평가 방식부터 손질한다. 기존의 경직된 등급제 평가를 없애고, 도전적 과제 수행 과정에서 의미 있는 시도와 축적된 지식이 확인되면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바꾼다. 고위험 고수익형 연구에 실패의 자유를 부여해 장기적으로 혁신 가능성을 높이겠다는 의도다.
출연연의 인건비를 과제 수주에 과도하게 연동시켜왔던 PBS는 단계적으로 폐지된다. 대신 국가 전략과제 중심의 임무 기반 기본연구사업과 전략연구사업으로 출연금을 재편해 연구기관이 장기 과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구조를 바꾼다. 회계연도 일치제도 폐지해 연말 예산 소진 압박을 줄이고, 간접비 사용 전체에 네거티브 규제를 도입해 연구비 사용 자율성을 확대한다. 규정에 금지된 영역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연구 현장이 재량에 따라 집행할 수 있는 구조로 전환하는 것이다.
대형 R&D 사업의 속도를 높이기 위한 예비타당성조사 제도 개편도 눈에 띈다. 정부는 1000억원 이상 대형 R&D 사업에 대해 현재의 예타 절차를 폐지하고, 기획 보완 중심의 맞춤형 사전 점검 체계로 바꿀 계획이다. 경제성과 수익성 중심 평가로 인해 선도 연구가 지연됐다는 비판을 의식한 조치다. 다만 재정 건전성과 사업 중복을 막을 장치가 어떻게 설계될지에 따라 정책 효과가 갈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R&D 관리 과정에도 AI가 도입된다. 예산 심의와 과제 평가, 수행 관리 전 과정에 AI 분석을 적용해 유사 과제 중복을 줄이고, 연구 성과와 기여도를 정량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다. 연구 성과 사업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AI 기반 성과확산 플랫폼을 구축해 유망 기술과 수요 기업을 자동 매칭하는 체계를 도입한다. 더불어 기술료를 현금이 아닌 주식과 지분으로 분배하는 방안을 도입해 연구자가 기술 이전과 창업에 적극 나설 유인을 제공하겠다는 방침이다.
인재 확보 전략 역시 범부처 차원에서 강화된다. 정부는 세계적 수준의 연구 업적을 가진 과학자와 공학자를 국가과학자로 선정해 2030년까지 100명 규모로 육성하고, 예산과 인력, 행정 지원 등 특전을 부여한다. 성장 잠재력이 높은 박사급 연구자는 젊은 국가과학자로 선발해 장기 과제와 독립 연구공간을 보장하는 방향이 검토된다. 학령인구 감소와 이공계 기피가 겹치는 상황에서 국내 핵심 인재를 과감히 묶어두겠다는 계산이다.
이공계 학생과 청년 연구자 지원도 확대된다. 국가 장학금 수혜율을 높여 학비 부담을 줄이고, 청년과기인 도약 적금 등 금융 지원 수단을 신설해 연구 초기 단계의 생활 안정성을 높이는 방안이 추진된다. 대학 내 전문연구인력 직위를 새로 만들고, 출연연의 신진 연구자 채용을 늘려 안정적 연구직 일자리 풀을 넓힌다는 계획도 포함됐다. 보상 체계는 성과 중심으로 재편해 우수 연구 성과에 대한 보상이 분명해지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해외 인재 유치 전략에서는 미국에서 이탈하는 과학기술 인력과 동남아 등 개도국 연구자 등을 중심으로 전략적 영입을 강화한다. 2030년까지 해외 인재 2000명, 이 중 한인과학자 70퍼센트를 목표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탑티어 특별 비자 제도를 확대하고, 영주와 귀화 패스트트랙 적용 대학을 넓혀 정주 여건을 개선한다. 유학 단계에서 국내에 들어온 우수 외국인 유학생이 졸업 이후 국내 연구기관과 기업에 안착하도록 지원하는 정책도 연계될 예정이다.
이번 회의에서는 과학기술관계장관회의 운영 방안도 함께 확정됐다. 과기정통부 장관이 부총리로 승격되면서 회의 의장을 겸하고, 기획재정부와 교육부, 산업부 등 주요 부처 장관을 포함한 19개 기관장이 상임 위원으로 참여한다. 회의는 매월 개최를 원칙으로 하며, 부처 간 이견을 사전 조율해 정책 실행력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문재인 정부에서 2021년 말 개최를 끝으로 중단됐던 회의체가 이재명 정부에서 정부조직법 개편과 함께 부활한 셈이다.
이날 안건에는 국방부의 국방 AX 전략, 산업부의 제조AX 추진 방향, AI전략위원회의 AI 분야 한 UAE 국빈방문 성과와 후속조치, 중소벤처기업부의 중소기업 AI 활용 확산 지원 방안, 외교부의 APEC AI 이니셔티브 채택 보고 등도 포함됐다. 정부는 과학기술과 AI를 국가 전략의 중심축으로 삼는 만큼, 부처별로 흩어져 온 개별 정책을 과기장관회의를 통해 묶어내겠다는 방침이다. 산업계와 연구계는 대규모 제도 개편이 현장의 연구 자율성과 민간 혁신 투자로 이어질지, 그리고 AI 민생 프로젝트가 실제 생활 속에서 체감될지 지켜보고 있다. 기술과 제도, 인재 전략의 정합성이 새로운 성장의 조건이 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