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랄 상품 위한 이슬람 회랑 추진”…러시아, 탈레반 정권과 경제 협력 심화 전망
현지시각 기준 15일,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수도 카불에서 러시아무역센터 대표 발언을 통해 러시아(Russia),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 아프가니스탄을 잇는 신규 무역 경로인 이른바 이슬람 회랑 구상이 공개됐다. 이번 구상은 러시아의 제재 회피형 교역 다변화와 탈레반 정권과의 실질적 협력 심화를 함께 겨냥해 역내 무역 질서에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이슬람 회랑은 러시아 연방 내 타타르스탄(Tatarstan) 공화국에서 출발해 투르크메니스탄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으로 이어지는 노선으로 설계됐다. 이란(Islamic Republic of Iran)의 타그리브 뉴스통신은 카불 주재 러시아무역센터 루스탐 하비불린 대표 발언을 인용해 3국 간 회랑 구축을 위한 실무 문건이 이미 작성됐으며, 조만간 관련 협정이 체결될 것이라고 전했다. 하비불린 대표는 이 회랑이 이슬람율법에 부합하는 할랄 상품 운송을 위한 핵심 물류 통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비불린 대표에 따르면 이슬람 회랑은 단순 도로망이 아니라 강과 해상 루트를 결합한 복합 운송망 형태로 설계돼 물류비 절감을 중점 목표로 삼고 있다. 타타르스탄이 이미 회랑 조성에 필요한 물류·산업 인프라를 갖추고 있어, 이 경로를 활용할 경우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 간 기존 교역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수송 비용을 크게 낮출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다만 구체적인 건설 일정과 총 투자 규모, 재원 조달 방식 등 세부 계획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이슬람 회랑이 실제 가동될 경우 러시아는 해당 노선을 통해 석유제품, 식물성 기름, 밀가루, 설탕, 전자장비, 원유·가스 산업용 기계류 등 주요 공산품과 에너지 연관 품목을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내는 수출 통로를 확대할 전망이다. TNA는 전문가 평가를 인용해 회랑이 완성되면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 간 양자 관계 강화와 동시에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역내 무역 통합 수준이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타타르스탄 공화국은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Moscow)에서 동쪽으로 약 800km 떨어진 지역에 위치한 주요 산업·물류 거점이다. 러시아는 서방 제재 속에서 비서방 국가와의 에너지 및 제조업 공급망을 재편하는 움직임을 보여 왔으며, 이번 이슬람 회랑 구상도 그러한 흐름과 맞물린 전략적 시도로 해석된다. 도로·강·해상을 결합한 형태의 회랑은 제재 환경에서 대체 운송망을 확보하려는 러시아의 계산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현재 전 세계 국가 중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상 유일한 주요국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이번 회랑 계획은 탈레반 정권과의 경제 협력을 제도화하고 장기화하려는 포석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아프가니스탄 측 입장에서는 만성적인 외화 부족과 인프라 미비 상황에서 러시아발 석유제품과 식량, 산업용 설비를 보다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통로가 추가되는 셈이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은 2021년 8월 미군 철수 이후 재집권한 뒤 이슬람 율법 준수를 내세워 여성의 교육과 취업, 공적 공간 참여를 광범위하게 제한해 왔다. 이 때문에 유엔(UN)과 서방을 중심으로 심각한 인권 침해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China), 이란, 러시아 등 11개국은 탈레반 정권을 공식 국가로 승인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카불에 대사관을 유지하며 실용적 교역과 외교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러시아의 이슬람 회랑 구상도 이러한 현실주의 외교 흐름 속에서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카불 주재 각국 공관이 철수 대신 현지 주둔을 택한 배경에는 광물·에너지 자원과 전략적 위치를 가진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 구상과 연계해 광물 개발 및 인프라 투자를 모색하고 있으며, 이란과 중앙아시아 국가들 역시 육상·철도 회랑을 통해 남북·동서 물류 거점을 구축하려는 구상을 추진 중이다. 러시아의 이슬람 회랑은 이런 지역 구상과 교차하며 새로운 연결 축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러시아의 행보가 탈레반 정권의 외교적 고립을 부분적으로 완화하고 경제적 생명줄을 제공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서방 주요국은 탈레반의 여성 인권 정책과 민주적 통치 부재를 이유로 대규모 공식 지원과 투자를 제한하고 있다. 반면 러시아와 일부 이슬람권, 인근 국가들은 인권 문제와 별개로 안보 안정과 경제적 이익을 앞세워 관계 유지를 택하고 있어, 가치와 이해가 엇갈리는 다층적 구도가 형성된 상태다.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 간 교역 규모는 지난해 기준 약 30억달러 수준으로 추정되며, 최근 수년간 빠른 증가세를 보여 왔다. 양국 정부는 이슬람 회랑 구상 등을 기반으로 2030년까지 양자 무역을 100억달러로 확대한다는 목표를 제시한 상태다. 제재 환경에서 새로운 시장을 찾는 러시아와, 경제 회복에 외부 자본과 물자가 절실한 아프가니스탄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풀이된다.
서방 주요 매체들은 아직 구체적 분석을 내놓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이슬람 회랑 구상이 중앙·남아시아를 관통하는 대체 교역망을 촉진할 수 있다고 본다. 전통적으로 파키스탄, 이란을 거쳐 형성돼 온 남북 물류 축에 러시아-투르크메니스탄-아프가니스탄 루트가 추가될 경우, 역내 에너지와 곡물, 공산품 이동 경로가 다변화되면서 제3국에도 간접 영향이 미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다만 아프가니스탄 내 치안 불안과 제재 환경, 금융 결제망 제약 등 구조적 리스크가 여전히 크다는 점에서 회랑 계획의 실질적 이행 여부에는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 국제 금융기관 참여가 제한된 상황에서 각국이 어떤 방식으로 투자와 결제를 설계할지도 관건으로 지목된다.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이슬람 회랑 추진이 서방 제재 속에서 비서방권 연대를 강화하는 움직임과 맞물려 향후 유라시아 무역 지형에 점진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국제사회는 탈레반 정권에 대한 인권 우려와 별개로 이 회랑 구상이 실제 물류망으로 구현될지, 또 2030년 교역 100억달러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