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핵심기술 표준화전략맵…TTA, 국제표준 선점으로 기술패권 겨냥
디지털과 인공지능 기술이 국가 경쟁력과 안보까지 좌우하는 시대에 맞춰 국내 표준화 전략이 재정비되고 있다.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TTA가 공개한 2026년 ICT 표준화전략맵은 앞으로 3년간 우리 기업과 정부가 어떤 기술 표준에 역량을 집중해야 하는지 구체적 방향을 제시했다. 단순 기술 규격을 넘어서 국제 규범과 규제 설계 단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려는 시도로, 업계에서는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TTA는 24일 국내외 ICT 표준화 동향과 시장 수요를 반영한 2026년 ICT 표준화전략맵을 발간했다고 밝혔다. 이번 전략맵은 우리 정부와 기업이 중점적으로 추진해야 할 기술별 표준화 항목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일종의 국제표준 공략 지침서다. 디지털과 AI 기술표준이 각국의 규제와 결합해 산업 규칙을 정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최근 환경 변화를 본격 반영했다.

전략맵의 핵심은 12대 디지털 핵심기술 선정과 이에 대한 세부 표준화 로드맵이다. TTA는 AI, 데이터, 이동통신, 차세대보안, 양자정보통신 등 6대 디지털 혁신기술과 지능형네트워크, 클라우드, 블록체인, 방송, 미디어 등 6대 기반기술을 더해 총 12개 분야를 핵심축으로 정의했다. 이들 분야는 향후 글로벌 디지털 인프라와 서비스 구조를 좌우할 영역으로 꼽힌다.
세부 내용은 산학연관 전문가 182명이 참여한 기술표준분과위원회 논의를 통해 도출됐다. 총 82회 회의를 거쳐 2026년부터 2028년까지 3년 동안 주력할 171개 중점 표준화 항목이 선정됐고, 각 항목별 국제표준화 전략이 함께 정리됐다. 예를 들어 AI 분야에서는 데이터 상호운용성, 신뢰성 검증, 알고리즘 안전성 등 국제 논의가 진행 중인 영역을 우선적으로 담고, 6G와 양자정보통신에서는 주파수 이용, 보안 모델, 네트워크 구조 관련 규격 선점이 강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번 전략맵은 기술 개발과 표준화 활동을 분리하는 관행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목적이 강하다. 정보통신 방송 연구개발 사업의 표준 개발과 R&D 표준 연계 과제 기획에 전략맵 결과가 직접 반영되도록 설계됐다. 이를 통해 연구 단계에서부터 국제표준 채택 가능성을 염두에 둔 기술 설계가 이뤄지도록 유도하고, 민간이 보유한 원천 기술 중에서 표준화 가치가 높은 후보를 조기에 발굴하는 기준으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시장 측면에서는 글로벌 통신장비, 클라우드, 플랫폼, 보안 서비스 기업들이 자사 기술을 국제표준에 녹여내며 산업 규칙을 사실상 설계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기업을 위한 규칙 설계 참여 통로를 넓히는 의미도 있다. 표준을 선점할 경우 기술 수출, 라이선스, 장비와 서비스 판매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지만, 반대로 후발 주자로 남을 경우 필수특허 부담과 규제 적합성 비용이 급증할 수 있어서다.
TTA는 글로벌 공조를 통한 영향력 확대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유럽연합의 디지털 핵심기술 표준화 로드맵을 담당하는 INSTAR 프로젝트와 협력해 한 EU 공동 로드맵을 개발한 것이 대표적이다. 2025년에 두 차례 워크숍과 온라인 협의를 거쳐 AI, 6G, 데이터, 사이버보안, 양자, IoT, 엣지 등 6개 분야 공동 로드맵을 완성했고, 이를 기반으로 양측의 국제표준화 공조를 확대할 계획이다. 국제 표준화 기구에서 한국과 유럽이 동일한 방향의 기술 요구사항과 규제 원칙을 제시하면, 글로벌 표준 채택 과정에서 협상력이 커질 수 있다는 계산이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이미 디지털 기술 표준을 둘러싼 경쟁이 본격화된 상태다. 미국과 유럽은 AI 거버넌스 규범과 사이버보안 기준을 앞세우고 있고, 중국은 통신과 IoT 표준 영역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6G와 양자보안, 데이터 주권과 관련된 국제 논의에서도 주요 국가와 기업 간 주도권 다툼이 치열하다. 전문가들은 이번 전략맵이 국내 ICT 산업의 연구개발 방향과 수출 전략에 직접적인 기준점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정책 측면에서 전략맵은 향후 정부 R&D 예산 배분, 디지털 규제 설계, 국제 협력 프로그램 기획에도 참고자료로 활용될 전망이다. 특히 AI와 데이터, 사이버보안, 양자정보통신 등은 개인정보 보호, 국가안보, 산업경쟁력 이슈가 맞물려 있어 표준과 규제가 동시에 움직이는 영역이다. 규범을 수입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표준과 규제 설계에 참여하는 주체로 전환하려면 체계적인 국가 차원의 표준화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손승현 TTA 회장은 디지털 핵심기술 분야의 주도권 경쟁이 치열한 환경에서 국가 R&D 성과의 글로벌 확산을 위해 국제표준 선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전략맵을 기반으로 산학연관의 표준화 역량을 결집해 우리나라가 디지털 핵심기술 분야 국제표준화의 중심축으로 도약하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산업계는 새 전략맵이 실제 연구개발과 수출 현장까지 연결돼 국내 기업의 규격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