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원전에 내편 네편 왜 가르나"…이재명, 진영 넘어 과학 토론 주문

신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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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정책을 둘러싼 진영 논쟁과 과학적 검증 사이에서 청와대와 정치권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원전 확대와 축소를 둘러싼 정파적 공방이 장기화된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편 가르기"를 멈추고 과학적 토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17일 세종컨벤션센터에서 기후에너지환경부 등 관계 부처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원전 정책이 정치 공방으로 흐르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원전 정책이 정치 의제처럼 돼 버렸다. 효율성이나 타당성에 대해 진지한 토론이 이뤄지지 않고 편 가르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며 과학적 토론을 통한 정책 검증을 거듭 주문했다.

이 대통령은 "과학 논쟁을 하는데 내 편, 네 편을 왜 가르냐"고 반문하며, 우리 사회의 토론 문화 전반을 겨냥했다. 이어 "우리 사회가 토론도 없이 편 먹고 싸우기만 하면서 진실이 아닌 것들이 진실처럼 유통되는 경우가 많다. 참 웃기는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원전 정책 역시 진영 논리에 가려져 객관적 사실이 왜곡되는 사례가 많다고 우려를 표했다.

 

그는 문제의 근원을 정보 비대칭과 정치적 선동에서 찾으면서도, 해결 방향은 투명한 데이터 공개와 열린 토론이라고 못 박았다. 이 대통령은 "이런 일이 계속되면 안 된다. 사실을 있는 대로 다 털어놓고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각 부처와 유관 기관을 향해 원전 관련 수치와 리스크를 숨김없이 공유할 것을 요청했다.

 

업무보고 과정에서 이 대통령은 원전 정책의 구체 쟁점들을 직접 꺼내 들며 잇따라 질문을 던졌다. 먼저 원전 건설 소요 기간을 두고 "원전 한 곳을 건설하는 데 얼마만큼의 기간이 소요되느냐"고 물었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10년에서 15년 걸린다"고 답하자, 이 대통령은 여야가 제시해 온 상이한 수치 문제를 거론했다.

 

그는 "7년이 걸린다는 사람도 있더라. 이 기간에 대해서도 정당마다 말이 틀리다"고 말한 뒤, 웃으며 "김 장관도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라 못 믿겠다.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이 대신 말해보라"고 말했다. 장관의 당적을 언급한 이 발언은 각 정당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전문가 의견을 우선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실제 이 대통령은 발언과 질문을 이어가는 동안 수차례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문제를 꺼냈다. 그는 답변자가 나설 때마다 "어느 정당 소속인가", "당적이 없는 사람만 말하라"고 주문하는 등, 원전 논의에서 정파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거듭 드러냈다. 정책 결정에 앞서 당리당략을 걷어낸 전문가 토론 구조를 만들겠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혁신형·소형모듈원전인 i-SMR 상용화 계획도 도마에 올랐다. 정부가 2035년까지 i-SMR을 상용화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데 대해 이 대통령은 투자 규모와 실패 리스크를 함께 짚었다. 그는 "수천억 원을 들였다가 잘 안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질문하면서,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에만 의존한 정책 추진을 경계해 달라고 당부했다. 첨단 원전 기술 개발의 필요성을 인정하되, 비용 대비 효과와 안전성에 대한 냉정한 분석이 병행돼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원전 정책의 핵심 민감 사안으로 꼽히는 사용후 핵연료 문제도 언급됐다. 이 대통령은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자체적으로 할 수 있도록 미국과 협상하고 있다"며 관련 논의 상황을 언급했다. 이어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하면 부피가 확 줄어들 수 있다고 하던데 맞느냐"고 물으면서 기술적 사실 관계를 재차 확인했다.

 

이에 최원호 원자력안전위원장은 "알려진 바로는 5분의 1 정도로 저장 공간이 줄어들 수 있다고 한다"고 답했다. 다만 재처리 기술과 관련한 국제 규범, 핵비확산 문제 등은 별도 협의가 필요한 만큼, 향후 외교·안보 라인과의 조율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여야는 그동안 원전 정책을 두고 에너지 수급, 기후위기 대응, 지역 발전과 안전 문제까지 엮으며 정면 충돌해 왔다. 보수 진영은 탈원전을 비판하며 원전 확대와 수출을 강조해 왔고, 진보 진영은 안전성과 경제성, 재생에너지 전환을 앞세워 원전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 대통령의 발언은 이런 진영 간 공방과는 결을 달리해,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공론장을 만들자는 쪽에 방점이 찍혀 있다.

 

정치권에선 이 대통령 발언을 놓고 상반된 해석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여당은 원전 이슈에서 탈정파·실용 노선을 강조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지만, 야당 일부에선 원전 확대 혹은 축소 방향을 둘러싼 구체 입장을 요구하며 공세에 나설 가능성도 제기된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정책 결정 구조를 투명하게 열어 보이려는 시도라는 평가와 함께, 실제 집행 단계에서 이해관계 조정이 관건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정부는 원전·재생에너지·화력발전을 포괄하는 에너지 믹스 재설계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날 세종컨벤션센터에서 진행된 업무보고 역시 향후 국가 에너지 전략을 조정하는 출발점 성격을 가진다. 이 대통령이 진영 논리를 벗어난 과학적 토론을 강조한 만큼, 국회와 정부, 전문가 집단이 참여하는 공개 토론과 추가 보고 절차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은 원전 정책과 에너지 전환 전략을 놓고 향후 국회 국정감사와 상임위원회 회의에서 치열한 공방을 벌일 전망이다. 정부는 향후 에너지 기본계획과 원전 관련 세부 로드맵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국회와 협의를 확대할 예정이고, 국회는 다음 회기에서 원전 안전, 사용후 핵연료 관리, 차세대 원전 기술 육성을 본격 논의에 부칠 계획이다.

신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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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대통령#김성환장관#원전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