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단체, 의대정원 증원 위법 추진 고발…의료정책 신뢰 논란
의사 수급과 교육 인프라를 둘러싼 갈등이 의료정책 신뢰 위기로 번지고 있다. 대한의사협회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보건복지부 전직 수뇌부를 상대로 형사 책임을 묻겠다고 나서면서, 의료대란의 직접 원인으로 지목된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정책의 정당성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디지털 헬스케어와 바이오 혁신을 뒷받침할 장기 의료 인력 계획이 정치·법적 공방에 휘말리면서, IT·바이오 융합 의료 체계 구축에도 불확실성이 커지는 분위기다.
의협은 1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감사원 감사 결과 위법 소지가 확인됐다고 주장한 의대 정원 확대 정책과 관련해 책임자 5명을 검찰에 고발한다고 밝혔다. 고발 대상은 윤석열 전 대통령과 조규홍 전 보건복지부 장관, 박민수 전 복지부 차관, 이관섭 전 대통령실 비서실장, 장상윤 전 대통령실 사회수석 등이다. 모두 당시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방침을 설계·추진한 핵심 인사로 지목돼 왔다.

의협 대변인 김성근은 의료계 우려와 법치주의 원칙을 무시한 채 의대 정원 증원을 밀어붙였고, 그 결과 전공의 집단 이탈과 진료 차질 등 의료대란이 발생했다고 강조했다. 의료정책 수립 과정에서 수급 추계의 타당성, 이해당사자 협의, 입법·행정 절차 준수라는 기본 원칙이 훼손됐다는 주장이다. 특히 이번 사안은 의료 인력 정책이 국가 바이오헬스 전략, 지역 의료격차 해소, 디지털 헬스케어 인프라 확충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산업 전반에 미치는 파장이 적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의대 정원 증원은 중장기적으로 유전체 기반 정밀의료, 인공지능 임상 의사결정 지원 시스템, 로봇수술 등 첨단 의료기술의 현장 안착 속도와도 연결된다. 정부는 의사 부족을 근거로 정원 확대를 추진했으나, 의협은 단순 인력 수 증가보다 전문과 편중 해소, 공공의료 인프라 확충, 데이터 기반 인력 수급 모델링이 우선돼야 한다고 반박해 왔다. 특히 인공지능 진단 보조, 원격 모니터링 등 IT·바이오 융합 기술 확산을 전제로 하면, 단순 헤드카운트 방식의 의사 수요 예측은 오류가 클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돼 왔다.
이번 고발의 직접적인 근거가 된 것은 감사원의 정책 추진 과정 감사 결과다. 감사원은 지난달 27일 발표에서 의사 부족 규모 산정 과정의 근거가 불충분했고, 의사단체와의 협의가 부족했으며 절차적 정당성도 미흡했다고 결론내렸다. 구체적으로는 의사 인력 수급 예측 모델의 전제, 통계 활용 방식, 지역·전문과별 수요를 반영하는 지표 설계 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규모 증원 목표가 설정된 점을 문제로 봤다. 정책결정의 데이터 거버넌스가 취약했다는 의미다.
특히 이번 감사 결과는 의료 인력 정책 수립에서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유전체 분석, 전자의무기록, 보험 청구 데이터, 인구 통계 등 방대한 의료 데이터를 통합 분석해 중장기 수요를 예측하고, 이를 토대로 정원 조정과 교육과정 설계를 연동해야 한다는 논의가 힘을 얻고 있다. 미국과 영국 등은 이미 보건부와 통계기관, 의료정보 시스템을 연계하는 국가 단위 데이터 플랫폼을 바탕으로 의사와 간호사, 보건 인력 수급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하는 체계를 도입해 왔다.
반면 한국에서는 의대 정원 확대 논의가 정치 일정과 단기 지역 민원에 휘둘리면서, IT·바이오 혁신을 입증할 수 있는 장기 수급 모델링이 뒷전으로 밀렸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의료계는 인공지능 기반 진단, 원격 모니터링, 디지털 치료제 확산에 따라 의사의 업무 구조가 바뀌고 생산성이 향상될 경우, 동일 환자 수를 더 적은 인력으로도 커버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반대로 정부는 고령화 속도와 필수의료 붕괴 위험을 감안하면 현재 추계보다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할 수 있다고 맞서고 있다.
의협의 형사 고발에 이어 민사 소송도 예고된 상태다. 의협은 의료대란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모아 공동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며, 현재 법제팀을 중심으로 수억 원대 이상 손해배상 청구 규모를 검토 중이다. 전공의 이탈로 수술과 응급진료가 지연되면서 환자들이 입은 손해를 어떻게 법적으로 산정할지, 정책 결정자에게 어느 범위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가 향후 쟁점이 될 전망이다.
이번 사태는 IT·바이오 융합 의료체계 전환 과정에서 의료 인력 정책과 기술 도입 전략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라는 구조적 질문도 남겼다. 원격의료와 디지털 헬스케어 플랫폼 확대를 전제로 하는 국가 전략이라면, 지역별 의료 인프라와 네트워크 병원,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인프라 구축을 포함한 통합 청사진이 먼저 제시돼야 한다는 지적이 커지고 있다. 의료 인력 증원은 그 뒤에 교육 커리큘럼 개편, 디지털 역량 강화, 데이터 활용 윤리 교육 등을 포함해 설계하는 편이 타당하다는 시각이다.
해외에서는 의료 인력 정책과 디지털 헬스 전략을 연계하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영국은 국가 의료서비스 체계 재편과 함께 전자의무기록 표준화, 원격 모니터링 인프라, 유전체 데이터 뱅크를 연계한 정밀의료 전략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를 반영해 특정 전문과 정원과 교육 과정을 조정하고 있다. 미국도 원격진료 상환 기준과 임상정보 교류 표준을 정비하면서, 준의사급 인력과 협업을 전제로 한 팀 기반 진료 모델을 확산하는 중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에서도 의대 정원 증원 여부를 넘어, 어떤 의료 인력을 어떤 기술 환경에서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거버넌스부터 재설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인공지능 판독과 로봇수술 시스템을 운용할 수 있는 의사, 빅데이터 분석을 이해하는 임상의, 환자 참여형 디지털 치료제를 처방·모니터링할 수 있는 전문 인력 등 역할 다변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단순 정원 확대가 아니라, IT·바이오 융합 역량을 측정하고 강화하는 지표 체계와 교육 기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배경이다.
의협 고발로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은 사법 당국의 판단을 기다리게 됐다. 수사 결과에 따라선 향후 정부의 의료 인력 계획과 디지털 헬스·정밀의료 관련 국가 전략도 상당 부분 수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산업계는 첨단 의료기술을 실제 병원 현장에서 구현할 수 있는 인력과 인프라 구성이 어떻게 재조정될지, 그리고 정치·법적 공방이 의료혁신의 속도를 늦추는 변수로 작용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