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심 개방한 중국 스마트폰”…애플 압박에 규제 풀며 유심 전환 가속
손톱만 한 물리적 유심 칩을 빼고 끼우는 시대가 빠르게 저물고 있다. 스마트폰 최대 격전지 중 하나인 중국이 스마트폰용 e심을 공식 허용하면서,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의 e심 전환 속도가 한층 붙을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유심 트레이를 없애 기기 내부 공간을 절약하는 설계가 가능해지면서, 얇고 가벼운 폰과 대용량 배터리, 대형 카메라 센서를 둘러싼 하드웨어 경쟁 구도에도 변곡점이 생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에서는 이번 조치가 프리미엄 단말 전략과 공급망 구조까지 재편하는 신호로 보고 있다.
중국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10월부터 e심 스마트폰 판매가 정식 승인됐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지난달부터 중국 판매용 스마트폰에 e심 탑재가 허용되면서, 글로벌 메이저 제조사들이 중국향 제품에도 e심 기능을 본격 적용할 수 있게 됐다고 분석했다. 중국 공업정보화부 MIIT가 스마트폰 e심 전국 시범 도입을 공식 승인하면서 차이나모바일, 차이나유니콤, 차이나텔레콤 등 3대 이동통신사가 나란히 e심 개통 서비스를 열었다.

시장 데이터도 변화를 뒷받침한다. 카운터포인트에 따르면 올해 전세계 스마트폰 판매에서 e심을 탑재한 모델 비중은 약 37퍼센트로 집계됐다. 내년에는 전체의 48퍼센트, 사실상 절반에 근접한 수준까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카운터포인트는 향후 중국 시장에 출시되는 대부분의 신제품이 e심과 물리 유심을 동시에 지원하는 듀얼 구조가 될 것으로 전망하며, 이를 완전한 e심 전용 단말 시대로 가기 위한 과도기로 해석했다.
중국은 지금까지 규제와 보안 관점에서 스마트폰 e심 도입을 수년간 미뤄왔다. 모든 휴대전화 번호가 실명 인증과 의무적으로 연동되는 환경에서, 원격 발급이 가능한 e심이 사용자의 신원 확인 체계를 흐리거나, 통신 사업자의 가입자 관리 시스템에 혼선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 왔다. 통신이 국내 네트워크와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이뤄지도록 설계된 중국식 데이터 거버넌스 정책과의 정합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국가 차원의 판단도 작용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e심 표준이 글로벌에서 확산된 이후에도, 스마트워치나 일부 IoT 기기에 국한돼 활용됐다. 애플, 화웨이, 샤오미, 오포, 비보 등 주요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중국 내수용 모델에 듀얼 물리 심 슬롯을 기본 탑재했으며, 글로벌용 e심 지원 모델과는 별도의 설계·생산 라인을 운영했다. 해외 판매용 아이폰과 갤럭시가 이미 e심을 적극 지원하고 있음에도, 중국 시장에서는 해당 기능이 소프트웨어·하드웨어 차원에서 봉인된 구조였다.
이번 e심 개방에도 중국 특유의 통제 방식은 그대로 유지된다. 사용자가 e심을 활성화하려면 통신사 매장을 직접 방문해 실명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차이나유니콤은 온라인에서 e심 발급 예약 신청을 받지만, 최종 신분증 대조와 개통 승인 단계는 오프라인 매장 방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원격 개통이 자유로운 다른 국가들과 달리, e심의 편의성을 인정하면서도 가입자 정보 통제권은 정부와 통신사가 쥐고 가겠다는 구조다.
경직된 규제를 움직인 촉매제는 애플로 평가된다. 애플은 10월 중국 시장에 e심 전용 스마트폰인 아이폰 에어를 선보이며 e심 개방에 힘을 실었다. 중국 최초의 e심 전용 스마트폰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애플이 자사 프리미엄 라인업에 e심을 사실상 기본값으로 삼겠다는 신호를 보낸 셈이다. 업계에서는 MIIT가 미리 정책 시범 도입을 선언한 상황에서, 애플과 통신사 간 실무 협의가 맞물리며 개방 시점이 앞당겨졌다는 관측을 내놓는다.
애플 입장에서는 중국 e심 개방이 생산전략 측면에서도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동안 중국 시장 특수 규제를 고려해 글로벌 공통 모델과는 별도로 듀얼 물리 심 전용 설계와 부품 체인을 유지해야 했지만, 이제는 e심 기반 설계를 중국에도 공통으로 적용할 여지가 생겼다. 특히 아이폰 에어처럼 물리 심 슬롯을 제거한 e심 전용 구조를 확대하면, 기기 내부 설계가 단순해지고 부품 수가 줄어 생산 효율과 원가 관리 측면의 이점이 생길 수 있다. 다만 중국 규제를 준수해야 해 중국에서 판매되는 아이폰은 중국 내 통신사의 e심만 사용할 수 있고, 해외 통신사 e심은 여전히 제한된다.
애플을 기점으로 중국 내 주요 제조사들도 발맞춰 e심 전환에 속도를 내는 분위기다. 화웨이는 메이트 70 에어를 통해 중국 시장 최초의 자사 e심 지원 스마트폰을 공개했다. 이름에 에어를 붙인 것 역시 얇은 두께와 경량화를 강조하는 동시에 e심 전용 설계를 부각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이와 함께 오포와 비보는 향후 출시할 주력 모델에서 e심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히며 로드맵을 구체화했다. 새로 공개된 비보 X200 시리즈는 이미 e심 지원을 주요 스펙으로 명시했다.
반면 샤오미, 아너, 삼성전자는 e심 전환 속도가 다소 느린 편으로 평가된다. 이들 브랜드의 2025년 및 2026년 초 출시가 예상되는 신규 모델 상당수는 여전히 듀얼 물리 심 중심 설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e심 지원도 병행하는 수준에 그칠 것으로 관측된다. 중국 내수 소비자들이 여전히 심 카드를 교체하며 통신 요금제를 갈아타는 습관에 익숙하고, 지방 통신사 인프라나 요금제 구조 등 변수가 많다는 점이 고려된 선택으로 풀이된다.
국내 시장에서는 이미 3년 전부터 e심 서비스가 본격 도입됐다. 2016년 GSMA가 e심 표준 규격을 발간한 이후, 2020년을 기점으로 60여개 국가에서 e심 상용 서비스가 시작됐지만, 한국 역시 관련 법령 정비와 과금 체계 마련 문제로 도입 시점이 다소 늦춰진 바 있다. 이후 이동통신 3사가 e심 기반 듀얼넘버 상품을 내놓으면서, 스마트폰 한 대로 개인용과 업무용 번호를 동시에 쓰거나, 국내·해외 번호를 병행하는 활용 사례가 빠르게 늘었다.
e심의 기술적 구조는 기존 물리 유심과 기능적으로는 같다. 가입자 식별 정보와 암호키를 담아 통신사 네트워크와 단말을 연동하는 역할을 맡지만, 구현 방식이 다르다. 물리 유심이 탈착 가능한 칩 형태라면, e심은 단말기 메인보드에 납땜된 내장 칩에 통신사의 가입자 프로파일을 QR코드나 전용 앱을 통해 원격 다운로드해 쓰는 방식이다. 덕분에 실물 카드를 배송받거나 직접 교체할 필요가 없고, 파일 형태로 발급받는 만큼 발급 비용도 일반 유심보다 절반 이하 수준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e심 도입으로 듀얼심 사용성이 크게 확장됐다. 기존에는 듀얼 심 슬롯이 탑재된 일부 모델에서만 두 개의 물리 유심을 동시에 쓸 수 있었지만, e심과 물리 유심을 조합하면 듀얼심 구성이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통신사들은 이를 활용해 국내 통신사 e심과 해외 로밍용 e심을 번갈아 쓰거나, 데이터 전용 회선을 추가로 구성하는 상품을 출시하며 수익 모델 다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용자 입장에서는 출장을 가거나 단기 유학을 떠날 때 현지 유심을 구매해 끼우지 않고도, 현지 e심 요금제를 온라인으로 개통해 쓰는 선택지가 넓어지는 셈이다.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하드웨어 설계 유연성이다. e심은 기기 내부에 통합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별도의 심 트레이, 슬롯, 방수 패킹 등 물리 부품이 필요 없다. 심 트레이가 사라져 확보된 공간은 배터리 용량을 키우거나, 카메라 모듈과 이미지센서를 대형화하고, 방열판과 그래파이트 시트 등 발열 관리 부품을 더 넓게 배치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외부와 기기 내부를 관통하는 구멍이 줄어들면서 방수·방진 성능을 높이기도 유리해진다.
애플이 두께 5.6밀리미터의 초슬림 아이폰 에어를 e심 전용 모델로 설계한 것도 이러한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이다. 얇은 본체에 고성능 프로세서와 카메라, 배터리를 모두 담기 위해 내부 공간을 미세 단위까지 쪼개 쓰는 과정에서, 심 트레이가 차지하는 여유 공간을 줄이고 다른 부품으로 대체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향후 다른 제조사들도 초박형·폴더블 기기에서 유사한 설계를 확대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제조·환경 측면에서도 e심 전용 모델은 이점이 있다. 글로벌 공통 하드웨어 플랫폼을 유지하면서, 소프트웨어적으로만 지역별 통신 규격과 주파수, 규제 조건을 반영하면 되기 때문이다. 물리 유심 카드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플라스틱 사용량과 포장재, 물류 비용을 줄일 수 있고, 반도체 패키징과 인쇄 공정도 일부 절감된다. 카운터포인트는 아이폰 에어와 같은 e심 전용 프리미엄 모델 출시에 대해, 애플이 중국 프리미엄 시장에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함과 동시에 글로벌 공급망 단순화를 통해 생산 효율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고 해석했다.
다만 e심이 무조건적인 장점만 가진 기술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중고 스마트폰 거래 시 물리 유심처럼 눈에 보이는 부품이 없어, 기기 초기화와 회선 해지 절차를 더 엄격하게 관리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통신사와 제조사가 제공하는 계정 기반 잠금 기능과 결합하면 분실·도난 단말 회수 및 악용 방지에는 유리하지만, 반대로 소비자가 단말을 자유롭게 전매하고 회선을 옮기는 과정에서는 절차가 복잡해질 수 있다. 일부 이용자들은 e심 프로파일 전송 과정에서의 오류나 호환성 이슈를 우려한다.
지역별 규제 차이도 과제다. 중국처럼 e심 개통에 오프라인 실명 확인을 요구하는 국가가 있는 반면, 유럽과 북미에서는 온라인 자가 개통 비중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기술 표준은 같지만 가입자 인증과 요금제 구조, 로밍 규칙이 제각각인 상황이라, 글로벌 단말 제조사와 통신사 입장에서는 국가마다 다른 정책과 고객 경험을 설계해야 하는 부담이 남는다. e심이 오히려 통신사 락인과 결합될 경우, 기기 교체 자유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그럼에도 업계 전반의 중장기 전망은 e심 확산 쪽에 무게가 실린다. 스마트워치와 태블릿, 노트북, 차량용 통신 모듈 등 다양한 기기에서 이미 e심이 표준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스마트폰에서도 프리미엄 세그먼트를 출발점으로 중저가 라인업까지 확산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통신사들은 다회선·다기기 요금제와 구독형 데이터 서비스, 지역 간 크로스보더 요금제 등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설계할 여지가 넓어졌다.
국내의 경우 이미 5세대 이동통신과 폴더블폰, 초슬림 스마트폰 경쟁이 겹쳐 있는 만큼, e심 기반 경량화 설계와 멀티 넘버 상품이 결합된 디지털 전환 경쟁이 더 치열해질 수 있다. 중국이 규제를 완화하고 e심 스마트폰을 본격 허용한 만큼, 글로벌 제조사와 통신사 간 e심을 축으로 한 기술·요금제 경쟁도 한층 달아오를 것으로 보인다. 산업계는 e심이 가져올 설계 혁신과 공급망 효율화가 실제 시장의 소비자 경험 개선과 수익성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지켜보고 있다.
